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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책이 없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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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내가 의과대학을 다니던 시절, 다른 학생들보다는 훨씬 덜했지만 의학 도서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거의 언제나 빈자리를 찾을 수 있어서 좋았고, ‘흉측한’ 사진이 있는 의학서적을 펼쳐 놓아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에 더 좋았다.

하지만 너무 삭막했다. 아무리 전문 도서관이라 해도, 명색이 대학 도서관인데 볼 만한 책이 너무 없었다. 의학 서적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소설책을 비롯한 ‘일반’ 서적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의사는 결국 ‘사람’을 다루는 직업이니 좋은 의사가 되려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교과서 말고도 다양한 책들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그러나 나는 도서관장님이나 학장님을 비롯한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자네 성적을 보니, 다른 책보다는 교과서를 좀 더 읽는 게 낫겠다”는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그때는 우리 학교 의학 도서관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의학 도서관들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비(非)의학 서적이 단 한 권이 없는 곳도 많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의사들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사회성도 부족하고, 환자들의 마음을 잘 몰라주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청년의사’라는 의료전문 신문사의 편집장이 됐다. 5년 전 어느 날,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의 ‘힘(?)’을 빌려 의료계 내에서 ‘독서 캠페인’을 벌여 보자는 생각을 했다. 의사·의대생을 위한 추천도서를 정기적으로 선정하고, 그 책을 전국의 의학 도서관에 보내자, 그리고 의사·의대생들에게 독후감도 쓰게 하자는 구상이었다.

여러 기업을 수소문한 끝에 ‘GSK(글락소스미스클라인)’라는 제약회사의 후원을 얻는 데 성공했다. 분기마다 다섯 권씩의 추천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추천도서들을 각각 두 권씩 전국의 의학 도서관에 기증하고, 모든 의사와 의대생을 대상으로 독후감 공모를 실시하는 이 캠페인은 현재 19번째 분기까지 진행됐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75개 의학 도서관에 별도의 서가가 마련됐고, 지금까지 기증된 책은 1만5000권에 달한다. 다음 달이 되면 추천도서 목록은 100권을 돌파한다. 응모되는 독후감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추천도서를 읽는 의료인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학생 수가 많은 몇몇 의과대학에서는 ‘책들이 모두 대출되어 여분이 없으니 좀 더 많은 책을 보내 달라’는 요청도 온다.

분기마다 적어도 한 권씩은 추천도서를 읽는다는 사람도 있고, 추천도서 모두를 읽기로 결심했다는 사람도 있다. 매번 독후감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다. 서두에 소개한 학생의 편지는 이런 일련의 일들이 낳은 작은 변화의 상징인 셈이다.

나는 믿는다. 다양한 책을 많이 읽는 의사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의사’의 자리에 ‘사람’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성인의 30%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최근의 통계는 참 아쉽다.

박재영‘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