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뿌리깊은 파벌정치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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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세명이 모이면 두개의 파벌이 가능하다. " 오히라 마사요시 (大平正芳) 전 일본 총리의 '명언' 처럼 자민당 역사는 파벌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지난 55년 이후 38년간에 걸친 일당지배 시절 파벌간 절충에 따라 새 정권이 탄생했고 당직.각료 인사도 정해졌다. 유력 파벌 영수는 늘 총리 0순위 후보였다.

파벌은 평소에는 물밑에서 연대를 다지지만 총재 선거때는 전면에 등장해 똘똘 뭉쳐왔다. '수 (數)' 가 곧 집권의 가늠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벌 영수는 돈.공천권 등을 통해 '수' 를 관리한다.

명절 때는 1인당 2백만~3백만엔의 '떡값' 을, 선거 때는 1천만엔 이상의 지원금을 보냈다. 파벌이 금권정치의 온상이 된 것은 이같은 조직유지비 때문이다.

94년 이전까지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여서 공천을 나눠먹기식으로 해왔고 같은 식으로 각료자리를 배분해온 관행도 '철 (鐵) 의 결속력' 을 갖게 만든 요인이다.

자민당은 파벌에 대한 비판여론에 따라 94년 파벌 해체를 선언했다.

파벌은 이후 각종 연구회.모임으로 이름을 바꿔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 새 총재 선출을 앞두고 다시 꿈틀대고 있다.

그러나 파벌 결속력은 예전 같지 않다.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공천권이 당 기구로 넘어갔고 새 정치자금법에 묶여 파벌 단독으로 돈을 마련하기가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도쿄 = 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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