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벤처 정치인은 없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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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가 국민의 걱정거리가 된 지 오래다.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고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본연의 책무를 뒷전으로 한 채 당파적 이해에 함몰돼 사생결단으로 막가는 정치권의 행태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여론이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가능케 한 IMF상황속에, 정권교체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사회 모든 분야의 적폐청산과 구조개혁 바람속에서도 정치권만은 여전히 '독야청청' 변화를 거부하는 몸짓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 투표가 이뤄질 7개 지구의 국회의원 재.보선까지 새 정부 출범후 세차례의 선거과정에서 여야 정당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를 덜기는커녕 오히려 확대, 심화시키는 경쟁을 벌여 왔다.

우리 정치의 특징이 무엇인가.

이념도 정책도 상관없이 인간관계.이해관계에 따른 패가르기, 1인 보스 중심의 폐쇄적 붕당질서, 자금.권력.정치공작을 이용한 내부통제, 그리고 금권.관권.지역감정.색깔론.흑색선전에 의존하는 대중조작과 지지강요다.

채 성숙하지 못한 시민의식과 이를 정략에 활용하는 정치권의 암묵적 악의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한국형 정치병' 은 만성의 단계를 지나 고질이 되었다.

그럼에도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계기로 시민들이 우리 정치에 새삼 기대를 걸었던 것은 6.25이후 최대의 국난에 대한 위기의식과 미흡하지만 정권교체를 이뤄낼 만큼은 성숙한 시민의식에 나름의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치병' 치유의 기대는 그러나 빗나갔다.

빗나가고 있다. 오늘 치러지는 재.보선도 민심과 유리된 정치권의 행사이기는 마찬가지로 보인다.

후보선정, 선거운동의 방식, 선거전의 쟁점과 논리, 유권자 반응… 한국의 평균적 시민이라면 듣고 보지 않아도 뻔한 또 한번의 과정이 반복됐다.

법정선거비용으로는 불가능한 선거조직을 운영하고 '당원단합' 을 핑계로 향응을 베풀고 후보들은 막가는 인신공격을 주고받고, 막판이 되자 정당의 수뇌부까지 나서 모략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발언으로 은근히 지역감정.색깔론을 부추기고…. 투표 결과가 나오면 아마도 여.야 정당은 각기 아전인수의 성명을 내고 상대를 비난하면서 새로운 정쟁을 준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당의 승패가 아니다.

6.25에 버금간다고 너나없이 말하는 국난의 복판에서 우리가 구태의 선거를 되풀이했다면 유권자까지 우리 모두의 패배일 수밖에 없다.

돌아보자. 이번 선거와 정치권 어디에 국난돌파의 의지와 치열한 고뇌가 있는가.

어디에 과거의 과오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새 출발의 결의가 있는가.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열어주는 비전이 과연 보였는가.

따지고 보면 정치야말로 본질에서 벤처산업이고 이어야 한다.

당위와 현실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고상한 이념보다는 낮은 차원에 욕망에 더 쉽게 휘둘리는 변덕스런 민심을 모아 불확실한 미래의 꿈을 눈앞의 현실로 만들어가는 정치의 기능은 어느 시대에서나 모험이고 도전이고 창조이지 과거의 답습, 타성의 반복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구태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 정치는 이미 정치의 본질을 잃은 것이다.

구각을 깨고 나와 정치권은 벤처기업적 본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환경의 변화를 민감히 포착하고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일찍이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법으로 사회적 현안의 해결에 접근하려는 진지한 노력 없이 우리 정치에 미래는 없다.

이대로라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에 앞서 우리 정치는 사회적 퇴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고 또 그래야 옳다.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민심은 이제 "우리 정치는 역시 안되겠구나" 하는 체념으로 빠르게 돌아서고 있다.

이런 체념이 중장기적으로 우리 정치판을 어떻게 바꿔갈지 알 수 없는 일이나 현재의 상황은 전혀 새로운 벤처정당.벤처정치인이 등장해야만 할 대전환기다.

위대한 정치가는 예외없이 벤처기업가였다.

토니 블레어론이 왜 야당 한구석에서 말로만 떠도는가.

문병호(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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