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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갖고 장난치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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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윗글은 국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려진 글 중 하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만큼 일은 소중하다. 아니 일은 생명이다. 할 일이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은 것이다.

# 60여 년 전 세상에 나온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30년간 오직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윌리 로만은 언젠가는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평생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의 주름은 펴지지 않았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두 아들 비프와 해피마저 그의 기대와는 어긋났다. 마침내 회사에서 해고당해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자 윌리 로만은 늘 다투어오던 아들 비프와 화해하던 날, 아들에게 보험금을 물려줄 생각으로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아 자살한다.

# 우리 주변엔 제2, 제3의 윌리 로만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나마 윌리 로만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30년이나 세일즈맨으로 일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앞으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일은 곧 내가 생존하는 방식이며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통로다. 일을 통해 사람은 크고 일을 하며 사람은 자란다. 더구나 사람은 일을 함으로써 비로소 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일자리를 잃으면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급속히 냉대하기 시작한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일이 없으면 삶은 남루해진다.

#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사람은 여지없이 변하기 시작한다. 첫째, 우두커니 멍하게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동네 근처 도서관에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책을 봐도 건성이다. 점점 더 멍해진다. 삶에서 일이 주는 긴장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둘째, 작심삼일도 어려워진다. 작심삼일은 그래도 결심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일터에서 멀어지면 아예 결심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결심할 계기조차 없어지기 때문이다. 셋째, 눈치만 는다. 결혼한 사람이면 아내가, 게다가 아이라도 있으면 아이들에게 제일 눈치가 보인다. 요즘 애들 눈치는 어른 뺨을 치고도 남는다. 아무리 둘러대고 위장해도 애들이 일 떨어진 상황을 눈치 채고 도리어 먼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실은 그때가 가장 눈치 보이는 때다. 넷째,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변화는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꺼려진다. 그러다 보니 더 위축되고 결국 좁다란 자기 안에 갇혀버리고 만다. 감옥이 따로 없다. 삶이 감옥이고 지옥이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변화다.

# 일은 생계 수단 그 이상이다. 일이 없으면 삶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일을 빼앗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국회 안에서의 논란과 파행은 점입가경이다. 지금도 정신 못 차린 국회는 너 잘했니, 나 잘했다 하고 갑론을박만 하고 있다. 정작 국회의원 스스로가 진짜 비정규직이 돼 봐야 정신 좀 차리려나. 더 이상 생명 같은 일을 갖고 장난치지는 마라. 언젠가는 국회 그 자체가 비정규직의 설움을 맛보게 될 터이니.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