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맹자,환란지대를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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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벌써 1년 넘게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 몇 나라가 맹자 (孟子) 의 측은지심 (惻隱之心) 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이 현자가 오랫동안 중단했던 열국 유세 (遊說) 를 다시 시작한 것을 보면 그 속마음을 알 수 있다.

맹자가 첫번째 이른 땅은 아시아 환란의 진원지인 태국. 추안 리크파이 총리가 어두운 얼굴로 마중나왔다.

"바트화가 밑바닥을 모를 지경으로 추락하고 외국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97년 7월은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그후 정권이 바뀌면서 외환위기는 한 고비 넘겼고 물가도 그런대로 안정됐습니다. 그러나 국제수지는 나아진 게 없고 실물경제는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실업자는 늘고 자살률은 높아지고 나라 전체가 우울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

"젊은 총리께선 왜 그렇게 의기소침하십니까. 현자 (賢者) 를 높이고 준걸 (俊傑) 을 부리면 정치와 행정이 잘 됩니다. 상업.교역.농업에 매기는 세금을 내리면 국민 사기가 올라갑니다. 어찌 외국에서도 우러러 보지 않겠습니까. "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가 5년 이상 간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자신과 낙관의 시대는 가고 불확실과 어둠의 시대가 온 것일까요. " "조급하면 어리석은 대책이 나옵니다. 옛날 송나라의 어떤 사람은 논의 벼가 자라지 않는다고 벼 포기를 뽑아올렸답니다. "

맹자의 다음 행선지는 인도네시아. 하비비 대통령이 묻는다.

"선생님께서 원로에 찾아주시니 저희 나라에 어떤 이익이 될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 맹자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한다.

"대통령께서는 어찌 이익에 대해서만 물으십니까. 나는 인의 (仁義)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린다.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10%, 실업률 14%, 소비자물가 상승 50%라는 엄청난 경제위기가 발등에 불로 떨어졌는데…. ) "옛날 주 문왕의 사냥터는 사방이 70리, 제 (齊) 선왕 것은 40리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왕의 것은 좁다 하고 선왕의 것은 넓다 했습니다. 문왕의 사냥터에서는 누구라도 노루와 꿩을 잡을 수 있었지만 선왕의 사냥터에선 짐승 한 마리라도 건드리면 살인죄와 같은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아, 빗대기 좋아하는 이 분은 쫓겨난 수하르토 일가의 부와 권력 독점을 말하고 있구나. 그러나 수하르토의 양자인 나보고 어떡하라고…. ) 맹자의 마지막 행선지는 한국.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영접을 나왔다.

"떳떳한 생업이 없으면 (無恒産) 떳떳한 마음도 없어진다는 (無恒心) 선생님의 가르침은 명심하고 있습니다.

기업보고는 어떡하든지 고용을 유지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사람이 떳떳한 마음이 없어지면 제멋대로 놀고 간사해지는 법, 어느 결에 예의를 찾겠습니까. 그런데 한가지 물어봅시다. 아무리 자신의 입장이 옹색해진다고 해도 지하철 선로에 불을 지르고 온라인 전산망을 파괴하는 것은 야만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까, 무엇입니까. " "다 제가 불민한 탓입니다. "

"장관들을 자주 야단치시는 모양인데 대통령 얼굴만 쳐다보는 버릇은 이 기회에 쑥 뽑아놔야 합니다.

나라의 오래 됨은 고목이 많다는 뜻이 아니고 나라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는 관료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 사람들 속에 섞여 노래를 부르셨다고요?" "한국을 소개하는 해외광고에 출연했습니다. "

"홀로 즐기는 것보다 여중낙락 (與衆樂樂) 이 항상 좋습니다. 유교 자본주의의 성공사례라고 하는 한국에서 공부자 (孔夫子)가 성심으로 가르친 예덕 (禮德) 과 내가 치열하게 설파한 인의를 깨우치면 무엇이 무섭습니까. 이미 한국인이 경세제민 (經世濟民) 의 원리를 터득했다면 그까짓 월 스트리트의 머니 게임이나 구조조정의 방법론에서 쩔쩔맬 이유가 없잖습니까. "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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