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김옥균파로 낙인찍힌 윤치호는 다시 유학길에 올라 1885년 1월 상하이의 미션스쿨인 중서학원(Anglo-Chinese College)에 들어갔다. 1887년 4월 그는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1888년부터 1893년까지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을 다니며, 미국의 번영이 기독교라는 정신적 가치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 제도에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때 품은 이상을 좇아 귀국 후 독립협회 운동을 주도한 한국 근대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는 영국·러시아 같은 제국의 지배를 문명화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고려하거나 일본과의 인종적 연대가 백인종의 침략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한 ‘비애국자’였으며, 일제하에서는 독립 무용(無用)론을 주장하거나 내선일체를 지지한 ‘소신 친일파’였다. 1905년 12월 12일자 일기는 그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준다. “내 행동이 당신을 혼동시키나요? 나는 러시아가 한국의 개혁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속았다는 것을 알자마자, 친러가 승진과 부를 의미했지만 나는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나는 한국을 위하는 범위 내에서만 일본에 호의적이다.” 호오(好惡)와 긍부(肯否)가 엇갈리는 외세에 대한 그의 모순된 인식은 외세가 아닌 민족을 주어로 해서 볼 때는 일관되어 있었다. 한 개인의 처신에 대해 단죄하기는 쉽다. 그러나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까닭을 밝혀내는 것이 우리 근대사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깊게 하는 데 더 보탬이 되는 길이 아닐까 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