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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하는 범위 내에서 친일” 내선일체 옹호한 윤치호의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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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윤치호(1864~1945)는 17세 나던 1881년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1883년 5월, 2년 남짓한 그의 유학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때 영어를 할 줄 아는 이가 그 말고는 없었기에 3개월 배운 영어실력으로 초대 주한 미국공사의 통역이 되어 귀국했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통해 그는 일본의 경험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믿고 따르던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 때문에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이 반드시 실패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스럽다.” 당시 윤치호의 부친 윤웅렬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미리 점쳤다. 아들의 일본 유학을 권하고 최초의 근대식 군대 별기군을 만들 만큼 그는 앞서서 깨어 있었다. 군복 차림에 칼을 찬 이가 그(사진=국사편찬위원회)이고 그 뒤에 선 이가 윤치호다.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김옥균파로 낙인찍힌 윤치호는 다시 유학길에 올라 1885년 1월 상하이의 미션스쿨인 중서학원(Anglo-Chinese College)에 들어갔다. 1887년 4월 그는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1888년부터 1893년까지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을 다니며, 미국의 번영이 기독교라는 정신적 가치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 제도에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때 품은 이상을 좇아 귀국 후 독립협회 운동을 주도한 한국 근대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는 영국·러시아 같은 제국의 지배를 문명화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고려하거나 일본과의 인종적 연대가 백인종의 침략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한 ‘비애국자’였으며, 일제하에서는 독립 무용(無用)론을 주장하거나 내선일체를 지지한 ‘소신 친일파’였다. 1905년 12월 12일자 일기는 그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준다. “내 행동이 당신을 혼동시키나요? 나는 러시아가 한국의 개혁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속았다는 것을 알자마자, 친러가 승진과 부를 의미했지만 나는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나는 한국을 위하는 범위 내에서만 일본에 호의적이다.” 호오(好惡)와 긍부(肯否)가 엇갈리는 외세에 대한 그의 모순된 인식은 외세가 아닌 민족을 주어로 해서 볼 때는 일관되어 있었다. 한 개인의 처신에 대해 단죄하기는 쉽다. 그러나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까닭을 밝혀내는 것이 우리 근대사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깊게 하는 데 더 보탬이 되는 길이 아닐까 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