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여의도 이론가'의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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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은행퇴출의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철석같이 약속한 예금지급이나 수표.어음교환은 이제야 부분 재개되고 있고 고객들의 불안과 불편은 계속되고 있다.

"인출이 왜 안되느냐" 는 항의에 금감위는 "원칙은 되도록 돼 있다" 는 답변뿐이다.

대책도 오락가락이다. 고용승계 의무는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 4급 이하의 고용승계를 확약하라고 인수은행에 요구했다.

또 은행신탁이 문제화되자 2일 오후 부랴부랴 처리방안을 내놓았지만 재정경제부와 손발이 안맞아 또 바뀌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처음부터 법이나 계약의 근거없이 저지른 일이라 대책도 인스턴트식이다.

금감위는 6월말까지 은행퇴출을 마무리짓는다고 예고해왔다.

6월말이란 연말 못지않게 결제업무가 폭주하는 시기다.

이때 은행전산망이 한곳이라도 끊기면 대혼란이 빚어진다는 것쯤은 예상했어야 했다.

하필 그런 때를 고르느냐는 의문에 금감위 당국자들은 "대비책이 다 있다" 고 호언했다. 그 당당한 태도에 누구나 준비가 충분한 줄 믿었다.

하지만 준비소홀과 퇴출은행원들의 반발속에 금감위는 속수무책이다.

퇴직금을 빼가고, 자료를 파기하며, 전산망 가동을 방해하는 게 은행원들의 수준이고 현실이지만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직업윤리 실종' 탓으로 돌리고 있다.

"왜 대비가 소홀했나" 고 따지면 "그걸 몰라서 묻나. 은행원들의 저항이 심해 그런 것 아닌가" 라며 짜증이다. 금감위의 대응책은 퇴출은행의 협조를 전제로 했다. 전제가 어긋나자 결과적으로는 '무대책' 이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자칫하면 판이 깨질 수도 있다.

또 혼란과 불편에 가려 구조조정의 명분조차 흐려지고 있다. 기업과 달리 은행은 정부가 직접 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다. 치밀하게 준비했으면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금융계에서는 이를 '여의도 이론가' 들의 실패라고 한다.

'여의도' 란 금감위, '이론가' 란 머리로만 구조조정한다고 덤벼드는 당국자들을 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론가' 가 아니라 현장에 밝은 '실무자' 다.

남윤호 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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