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저널]부실아시아 '울며 공장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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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지난 4월 28일 싱가포르의 한 호텔. 말레이시아 페낭에 위치한 전자부품회사인 캠 인터내셔날의 K.L.리 사장은 14시간에 걸친 공장 매각 협상을 끝내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건 너무 편파적인 합의다. " 그러나 미 컴퓨터 프린터 제조업체인 텍트로닉스사 (社) 측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맞받아쳤다.

"더 나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신을 얼마든지 몰아부칠 수 있었다. " 리 사장은 말문이 막혔다.

양측이 합의한 가격은 같은 규모의 공장을 새로 짓는 비용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지금 아시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각국 통화가치의 하락은 자산 가격을 폭락시켰고 현금이 아쉬운 기업들은 헐값에라도 팔 수밖에 없다.

이 회사도 지나친 설비 확장과 환율 상승으로 빚더미에 올라 지난 1월 한 공장을 팔아야만 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이 때 마침 자신들이 주문한 부품의 생산을 점검하기 위해 공장을 방문했던 텍트로닉스의 스페판 스미스 이사가 이를 전해들었다.

그는 곧 본사에 이를 보고했다.

제임스 콜 프린터부문 담당 사장은 "우리는 3년간 해외 진출을 모색해 왔는데 이번이 절호의 기회" 라며 무릎을 쳤다.

곧 협상팀이 싱가포르로 파견돼 회사 재무상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실망적이었다.

그들은 " (회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수록 공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점점 없어졌다" 고 입을 모았다.

다음날 페낭의 공장을 둘러본 뒤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다급해진 리 사장은 다음날 이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으나 이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7명의 저녁 식사 비용이 단 72달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협상팀은 아시아 경제가 얼마나 나빠졌는지 실감하게 된 것이다.

이는 더 싼 값에 공장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미 본사에 돌아온 협상팀은 공장과 생산 설비를 2천만달러에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협상단은 3월13일 페낭을 다시 방문해 본격적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회사 소유인지 알았던 설비 가운데 5백만달러 규모가 리스인 것이 드러났다. 협상팀은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리 사장은 오히려 느긋했다. 그는 당시 다른 미 회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 챈 협상팀은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회사와의 협상이 깨지게 되자 리 사장은 결국 이들을 급하게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협상팀은 4월26일 다시 싱가포르로 향했다.

마라톤 협상이 며칠째 계속됐다. 결국 1천만달러로 가격이 결정됐다.

회사 전체를 살리기 위해 리 사장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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