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부실기업 정리, 3자인수서 돈줄 봉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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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55개 퇴출대상 부실기업의 확정과정을 보면서 지난 86~88년 국제그룹을 포함해 57개 부실기업 정리 당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차이점이 많지만 비슷한 점도 제법 눈에 띄기 때문이다. 처리방법은 완전히 다르지만 정부가 깊숙이 개입한 점이나 선정기준이 불분명한 점은 비슷하다.

한일합섬은 86년에 당시 부실기업에 포함된 국제상사 등 5개사를 인수했지만 이번에는 스스로가 퇴출기업으로 지목됐다.

◇어떻게 처리했나 = 86년은 제3자 인수를 통해 부실기업을 살리는 쪽이었다.

부실기업의 빚을 유예시키고 이에 따른 은행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한국은행 특별융자를 동원했다.

인수기업에는 세금부담도 덜어줬다.한마디로 국민부담으로 부실기업을 제3자에게 넘긴 셈으로 인수과정에서 특혜시비도 있었다.

특히 주인만 바뀌었지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 는 대마불사 (大馬不死) 의 좋지 않은 전통을 굳히는 결과가 됐다.

하지만 당시 부실기업을 인수한 기아.우성.유원건설.해태.진로.극동건설 등이 90년대 들어 줄줄이 쓰러졌다.

반면 이번에는 신규대출을 끊어 퇴출을 유도한다는 게 기본원칙이다. 86년에는 환부를 치료해 끌고갔다면 이번에는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부실채권은 감수하더라도 퇴출을 통해 더 이상의 부실채권 발생은 막겠다는 뜻이다.

◇왜 정리했나 = 86년은 부실기업보다 부실채권을 잔뜩 안은 은행이 더 걱정이었다.

은행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부실기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번에는 부실채권이 늘어나는 은행도 문제지만 부실기업을 끌어안고 가다가는 우량기업마저 줄줄이 문을 닫을 우려가 있어 손을 댔다.

86년보다 훨씬 복잡하고 절박한 셈이다.

◇누가 주도했나 = 86년엔 정부가 주도했다. 김만제 (金滿堤) 전재무장관이 총대를 메고 3자인수.세금감면 등 실무작업을 처리했다.

국제그룹처럼 덩어리가 큰 기업의 처리는 전두환 (全斗煥) 전대통령이 최종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全전대통령은 부실기업 경영주에 대해 형사처벌을 해서라도 혼쭐을 내라고 할 정도로 부실기업 처리에 엄격한 면이 있었다.

이번에도 표면적으론 채권은행단이 결정했지만 실상은 정부가 깊숙이 개입했다.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이 조정역할을 했다. 특히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퇴출기업에 5대그룹을 포함시킬 것을 지시하는 등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결국 채권은행단이 만든 안을 李위원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최종확정했다.

◇문제는 없었나 = 86년엔 특혜시비가 문제가 됐다. 부실기업을 부채탕감을 통해 멀쩡한 기업으로 둔갑시킨 뒤 제3자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그룹의 경우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누구는 퇴출기업에 오르고, 누구는 빠졌느냐는 논란이다.

선정기준이 분명치 않고, 밀실작업으로 진행돼 객관성에 흠집을 남겼다는 평가다. 실제로 퇴출기업의 수도 수시로 바뀌었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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