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강위석 고문 한-네덜란드 축구 관전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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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네덜란드팀과의 한판은 참담했다.

월드컵 16강의 꿈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것도 5 - 0이라는 절망적인 스코어로 말이다.

축구장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한국에서 응원온 변호사 한분이 바로 이곳 마르세유대 대학원에 유학중인 윤혜성양에게 미안하고 풀죽은 농담을 걸었다.

"우리야 한국으로 돌아가니까 그래도 낫지만 여기서는 두고두고 오늘 경기의 골 점수가 한국사람 약올리는 화제가 될 텐데. 윤양은 창피해서 계속 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겠어요?" 이 말이 끝나자마자 이 한국인 유학생이 대답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라도 이곳에 남아서 더 잘해야죠. " 나는 20대의 이 젊은 사람의 말에서 문자 그대로 구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크게 기대하던 바를 크게 저버리는 일이 생기고 나면 엉뚱한 탓이 등장하기 쉽다.

그리고 마녀사냥이 대대적으로 시작되기 쉽다.

윤혜성양의 이 말은 실력이 모자라서 진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 한사람이라도 축구 아닌 다른 분야에서라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외에 이 창피를 면할 방법은 없다는 실천적 진리를 담고 있다.

전반전이 2 - 0으로 끝난 다음 15분간의 휴식시간에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리에서 꼼짝 안하고 앉아 있는 이회택 전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다가가 "실점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느냐" 고 물었다.

처음에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한번 더 물으니까 "우리선수들의 기량이 떨어지니까 그렇다" 고 대답했다.

사냥해야 할 마녀는 하나밖에 없다.

기량의 낙후 바로 그것이다.

일본도 우리와 같은 날 16강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아시아는 축구의 후진국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프랑스 월드컵대회는 축구가 급속하고 강력하게 어떤 거대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 돼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축구는 세계화라는 이 시대의 추진력이 문화면에서 선택한 자기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것 등 여러가지 의문이 학자들의 연구과제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 자체를 이미 의심할 수는 없다.

한국 - 네덜란드 경기 하루전부터 마르세유는 완전히 네덜란드인들에게 점령돼 오렌지빛 축제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정작 이곳 프랑스인들은 이들의 축제를 구경하는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주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다름아닌 축구다.

마르세유를 점령한 것은 네덜란드인들이 아니라 축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제환란을 당하여 세계화 추진이 이 환란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처럼 유해한 오해도 드물 것이다.

세계화는 참가하고 안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다.

마치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태풍이 불기를 사양하는 일이 없듯이. 태풍에 관해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전 사후적으로 거기에 대처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스스로 세계화하지 않는 것은 태풍에 대한 대처를 거부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런 사람은 태풍의 피해를 최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축구도 그것이 세계화 현상이라는 점에 동의하게 되면 어느나라건 월드컵에서 이기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기이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에서 외환순자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일본의 엔화가 남의 도움 없이는 폭락을 저지할 수 없다는 현상에 비하면 그다지 기이할 것도 없다.

세계화는 그것이 어떤 모습의 것이든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이런 특성이야말로 세계화가 갖는 으뜸가는 의미다.

세계화로서의 축구는 적어도 두가지 분명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세계화면에서 동시에 무엇보다 강력한, 심지어 전쟁보다 강력한 민족주의라는 점이다.

둘째는 여태까지의 어떤 혁명보다도 더 민중적이라는 점이다.

온 마르세유 거리를 밤새 기관총으로 무장한 검은 제복의 프랑스 시위진압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상대가 자기나라 국민이 아니라 하늘로 땅으로 바다로, 대중교통 수단과 자가용을 불문하고 자기 주머니 돈을 쓰며 몰려온 이웃나라 네덜란드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점을 잘 드러낸다.

한국사람들도 전민중적으로 '축구잘차기운동' 에 매달리지 않고는 결코 16강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축구에 비견할 세계화의 다른 한 과제는 아마도 영어라고 생각한다.

축구와 마찬가지로 영어는 세계의 언어다.

세계화이후로 세계화는 민족주의의 반대말이 아니게 되었다.

온 민중이 영어를 잘 할 수 있어야만 민족의 정보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강위석 고문=마르세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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