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구조조정]덩치큰 '수퍼은행'만 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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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은행 구조조정의 방향이 합병을 통한 대형화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우량은행을 주체로 한 인수.합병을 통해 이른바 선도은행 (리딩뱅크) 을 육성한다는 것이 정부의 밑그림이다.

그동안 금융감독위원회는 부실은행의 퇴출에 무게를 두다가 5월말에는 부실은행에서 부실자산을 분리해 처리한 뒤 나머지 우량자산을 다른 은행에 넘기는 자산부채인수 방식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은행을 통째로 붙이는 인수.합병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이젠 대통령이 선도은행의 필요성을 언급한 이상 큰 틀이 또 바뀌지는 않을 듯하다.

◇ 왜 서두르나 = 대형화가 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금감위는 이를 은행에만 맡겨두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대형화라는 목표는 정해졌는데 은행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다. 특히 12개 부실은행의 경영정상화계획에 합병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금감위는 이런 판단을 굳힌 듯하다.

더욱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공적 자금이 들어가게 되므로 정부의 간여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물론 금감위가 특정은행을 지목하지는 않고 있다.

대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이헌재 (李憲宰) 위원장이 최근 '선도은행' 이라는 말을 부쩍 많이 쓰고 있는 것이나 합병은행에 증자지원.부실채권 매입.특별보너스 지급 등 각종 인센티브를 주기로 한 것이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 누가 합병을 주도하나 = 우량은행이 주체가 된다. 절대적 기준은 없지만 결국은 BIS비율과 자산규모.경영성적 등이 합병주체은행을 가르는 기준이 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 현재 BIS비율이 8%이상인 시중은행 가운데 덩치가 크고 당기순이익을 낸 은행들이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한편 정부는 부실은행간의 자발적 합병을 구태여 막지는 않겠지만 지원은 일절 해주지 않기로 해 사실상 부실은행 주도의 합병을 부정하고 있다.

◇ 누가 합병대상이 되나 = 증자나 외국합작에 실패해 독자적으로는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운 은행들이 우선 대상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BIS비율 8%를 충족하지 못한 12개 은행중에서 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합병대상이 되면 대규모 감자 (減資) 를 실시해 주주의 부담으로 부실을 털어야 한다. 완전히 부실은행으로 판정받으면 대부분 피합병대상이 된다.

청산되는 경우는 극소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감위가 예금대지급 등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산부채인수 방식의 인수.합병을 추진키로 했기 때문이다.

부실자산은 이를 전담처리하는 배드뱅크로 넘기고 우량자산은 우량은행에 합병하는 식으로 정리한다는 것이다.

◇ 홀로서기도 가능한가 = 무조건 몇개 선도은행만 남고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국과 합작을 하거나 증자를 통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출 수만 있으면 우량 중견은행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외국지분이 있으면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기 어려우므로 외국합작이 독자생존의 관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 (BOA) 와 합작한 한미은행과 국제금융공사 (IFC) 의 출자가 확정된 하나은행 등이 이 부류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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