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클리닉] “축산이 뭐예요?” 어휘력·상식 없으면 백날 외워도 소용없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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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요! 답이 ②번인 줄 알았는데 ⑤번이래요.” “우리 반 애들 모두 틀렸어요. 찍은 아이 한 명 빼고.”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중학교 2학년 범수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연고주의가 뭔지 알아야죠. 무슨 바르는 연고(oint- ment)인 줄 알았어요. 노트에는 지역주의 탈피라고 써 있는데 말이죠.”

어휘와 상식이 모자란 상태에서 무작정 암기만을 해서 생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재수생 국한이는 올해 6월 4일 실시된 수능 모의고사에서 범수와 똑같은 현상을 보였다. 3교시 외국어 영역 18번 문항의 내용은 인간이 수렵생활에서 정착하기 위해 소양 등 가축을 기르는 내용의 지문이었다. 유학파 국한이는 지문을 단 몇 초 내에 다 해석했지만 보기를 보고는 난감했다. 보기엔 ①축산 ②조경 ③ 수송 ④임업 ⑤ 수렵이 있었다.

국한이는 고민 끝에 ④번을 답으로 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축산이 뭐예요. 그거 소돼지 등을 죽이는 거 아닌가요? 그건 반대 뜻인 것 같아 임업이라고 했어요.”

국한이는 축산과 도살을 착각했고, 뭔지 몰라도 기르는 것 같은 임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기초적인 어휘나 상식이 모자라면 제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기대한 만큼의 성적이 나올 리 만무하다. 필자는 이런 학생들에게 NIE(Newspaper In Education)를 강조하면서 일주일 숙제를 내기도 한다. 학부모들은 영어·수학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아이에게 쓸데없는 것을 시킨다며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필자가 8년간 학습클리닉을 운영하며 갑자기 성적이 수직 상승하는 학생들을 본 결과 그들의 비밀은 어린 시절 다독(多讀)에 있다는 점을 찾아냈다. 어려서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방에 틀어 박혀 책만 읽던 책벌레가 이런 막판 뒤집기의 승부사란 사실이다.

학부모 중엔 자녀들이 교과서·참고서는 싫어하면서 교과목과 상관없는 책만 열심히 본다고 걱정하는 분이 많다. 그러나 적어도 초·중등까지는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도 내버려두는 게 좋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는 그 과정에서 습득한 언어능력 및 두뇌 발달에 힘입어 어느 순간 반드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세계 최고의 갑부 빌 게이츠는 “책 읽는 습관은 하버드대 수석 졸업장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고,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역시 같은 맥락으로 “책을 통해 인생에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았다. 독서는 내게 희망을 줬다. 책은 내게 열린 문과 같다”고 했다. 어휘가 떨어지고 글의 근간을 모르면 7차 교육과정 이후 전 과목이 문장제 문제(서술형 문제)가 대세인 요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어휘력과 상식이 없으면 국어는 물론 앞서 예를 든 두 친구처럼 사회·영어, 심지어 수학·과학도 손대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찬호(43) 박사

▶신경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

▶마음누리/정찬호 학습클리닉 원장

▶중앙대 의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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