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한국 민주주의의 시간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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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통령선거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치권은 열흘 앞으로 다가온 6.4지방선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정치의 모든 것이 지방선거에서의 승리라는 계산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방선거는 지역주민들의 자치정부를 구성할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이기 때문에 중앙정치가 개입해서는 안되며, 지방선거의 결과를 중앙정부에 대한 신임투표로 해석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방선거가 중앙정치와 분리돼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아래서 선거가 갖는 역동적 역할을 간과한 것이다.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을 결정하는 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은 지역문제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에 대한 자신의 선호를 투표로 표시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지방선거가 새 정부.여당과 야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러한 인식 아래 여야가 자신들에 유리한 평가를 받기 위해 전략을 짜내고 유세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주주의 아래서의 정부는 항상 '한시적 정부 (government pro tempore)' 다.

민주주의 아래서 선거를 통한 권력의 위임은 영구적이지 않다. 선거에서의 승자는 정해진 임기동안만 권력을 위임받으며, 임기중에도 유권자들은 다른 수준의 선거를 통해 정부에 대해 기대와 실망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선 사이에 실시되는 지방선거는 지방자치정부의 구성이라는 본래의 목적 외에도 중앙정부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좋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중간평가의 역할을 하게 돼 있는 이번 지방선거의 타이밍이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의 관점에서 볼 때 좋지 않다.

새 정부가 문제를 파악하고 기본 정책을 수립해 법제화하고 시행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새 정부가 구성된지 몇 달도 안돼 실시되는 선거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에 좋은 시점이 아니다.

그리고 표를 극대화하고 지지의 상실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정부의 경제정책 수립과 집행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있다. 대기업의 파산이 몰고올 파장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업의 퇴출이 연기되고 있고, 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가 선거 이후로 미뤄지고 있다는 소리도 들리고 있다.

'때 이른 선거' 가 구조조정의 비용을 늘려주고 있는 것이다. 임기중 권력을 확실하게 보장해주고 있는 대통령제의 정치적 시간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의 중간평가 성격을 지닌 선거를 임기중에 실시하는 것은 민주정부의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출범한지 1백일이 못돼 지방선거가 실시되게끔 짜여진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시간표는 잘못된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시간표는 민주적 헌법 제정 과정에서의 타협의 산물이다. 6.29선언 이후 구권위주의 집권세력과 민주화연합세력간의 타협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제 헌법이 채택됨으로써 대통령 선거와 4년 임기의 국회의원선거의 동시화가 이루어지지 않게 됐고, 우여곡절 끝에 실시된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중앙정치의 시간에 대한 고려없이 실시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시간표는 주기성을 상실한 채 불규칙하게 짜여질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해 민주주의 시간표를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중앙정치의 시간을 통합해야 한다.

현행 헌정체제 아래서 대통령과 국회는 이원적 정통성을 갖고 있는 민주적 대표기구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선거일시가 다를 경우 국회의원선거는 대통령선거의 전초전이 되거나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의 기능만을 담당하기 쉽다.

동시선거의 실시는 국민의 집단적 의사를 확인할 수 있게 함으로써 권력의 위임을 둘러싼 혼란을 제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모든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는 것을 피하고 중앙정치의 시간과 지방정치의 시간을 분리해야 한다.

모든 선거를 동시에 실시할 경우 자원동원능력에서 앞선 현직에 유리하게 작용할 우려가 있다. 중앙정부 임기의 중간시점에서 지방선거가 실시되도록 시간표를 조정함으로써 지방선거의 중간평가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임혁백 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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