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길잡이]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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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수험생과 교사들이 "수험서처럼 완벽하게 정리된 한권의 고전자료나 도서가 없느냐" 고 종종 문의 해온다.

하지만 이는 과거 암기식 교육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안일한 태도로 몇권의 고전을 '찍어' 서는 결코 논술에 잘 대응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고전이든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지적 (知的) 사고를 전개할 수 있는 능력. 고전이 다루고 있는 주제를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는 배경지식과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다.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도 풍부한 배경지식을 가졌을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고전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서울대등이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 종언' 대신 고전으로 선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920년 이 책이 쓰여질 당시 '타락' '몰락' '종말' 과 같은 단어가 횡행하는등 진리와 인식의 객관성이 의심받고 있었다.

이 책은 모든 인식과 가치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상대주의적 가치에 영향받았으면서도 동시에 상대주의를 넘어서려고 시도한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주장은 어떤 인식이든 사회적.문화적 구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지식은 계급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책은 모든 인식이나 가치의 사회적 구속성을 인정하면서도 보편적 지식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만하임은 인식과 가치를 규정하는 사회의 하부구조를 마르크스와 달리 문화적.정신적.역사적 요소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인식과 가치에는 계급적 이해가 반영하기도 하지만 이같은 문화적.정신적 요소를 바탕으로 보편적 지식과 가치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아울러 객관적 지식과 보편적 가치 확보에는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특수한 계급이해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인식과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인정하려는 태도다. 이 책은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어 다양한 논제가 출제될 수 있다.

우선 모든 인식은 불가피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밖에 없다는 논지와 과학적 인식은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라는 주장을 대비해 논제를 출제할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 및 자연과학에서 과학이 객관적이냐 상대적이냐를 둘러싼 논의와도 연결된다. 또 과연 지식인이 계급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객관적 인식과 보편적 가치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논제도 검토해봐야 할 주제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해 지성인으로서 대학생에게 한번쯤 물어봄직한 논제다.

이 책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 종언' 처럼 현대 사회에서 이데올로기가 과연 종언을 맞게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를 붙여볼만한 주제이기도 하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wjsan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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