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상'수상 이치은씨 소설 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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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기성 사회를 지키기위해 세상을 권태롭게 여기는 자, 놈팽이들을 모두 처단하라. ' 얼굴 없는 작가로서, 또 가장 젊은 나이로 제2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이치은 (27) 씨의 장편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가 최근 출간됐다 (민음사刊) .IMF시대를 맞아 권태를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무위도식하는 인물들을 차례차례 암살하는 내용이나 그 인물들을 모조리 국내외 문학작품에서 따온 형식 등에서 이 작품은 일단 화제를 부를 것 같다.

"권태로운 자들… 그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깊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야. 그들은, 자신이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꺼운 보자기에 덮어둔 채, 사회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만 불평하지. 그런 사람들이 개미처럼 불어나는 거야. 물론 백신이 준비되어 있지. 전염병을 퇴치하는 약, 주사바늘 ; 나. " 작품에서 킬러로 나오는 기사 (騎士) 의 생각이다.

권태로운 자들을 전염병 같이 생각하는 기사는 사르트르의 '구토' 의 로캉탱, 모라비아의 '권태' 의 디노, 그리고 이상의 '날개' 에 나오는 주인공등 국내외 문학 작품에 나오는 권태의 대명사들을 암살해간다.

그 킬러는 누구인가. 밥 먹고 오줌 누고 잠자는 것처럼 영화에만 푹 빠져 산 사람. 그리고 영화를 자신의 인간관계의 대치물, 자신의 삶의 대신하기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

권태로움을 배제하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영화만 본 사람이 권태로운 사람들을 처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킬러의 권태로운 자 암살하기는 이야기의 바깥 구조에 불과하다. 작가는 권태로운 자들을 꼼꼼이 추적, 처단하게 하면서도 권태의 의미를 묻고 있다.

이 자본주의에서도 낭만적 권태, 자신만의 꿈꾸기는 가능한가. 이 과정에서 이상.사르트르.모라비아 등 작가들의 주인공 묘사를 그대로 인용하며, 또 이씨 스스로 그 인물들을 해석.재창조 해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은 물론 자신의 삶으로부터도 절연된 권태로운 자들을 통해 기존 관념을 배제하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하고 있다. 다른 작품에서 인용된 부분은 고딕체로 표기하고 또 주를 달아 '무슨 무슨 책에서 인용' 했음을 명기해 놓고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고 있다.

90년대초 우리 문단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혼성모방의 작품이 이제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게까지 된 것이다. 심사평에서 소설가 이문열씨는 "문학청년들에게 이런 형태가 다음 세대 소설의 유일하고 완전한 본보기라고 착각하고 분별없이 모방에 빠져들지 말것" 을 당부했다.

작가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했음만 밝히고 어떤 이유로 아직 얼굴과 본명 없이 컷과 필명으로만 나타났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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