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내일을 위한 '영웅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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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엔 영웅이 없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지나간 인물들이 있다곤 하지만 적어도 현재는 없다.

위기속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던가. 하지만 정부수립 반세기에 하루도 바람잘 날 없던 우리에게 영웅은 과연 있었던가.

사실 영웅 없기로 말하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다만 적지 않은 나라들이 알게 모르게 '영웅만들기' 에 나서고 있는 점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지난 5일 워싱턴에선 로널드 레이건 빌딩 건립행사가 있었다. 국제교역센터를 겸한 초현대식 건축물은 워싱턴 주변에서 펜타곤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백악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건물에 치매로 앓고 있는 레이건 전대통령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행사에 참석하는 낸시 레이건 여사를 위해 클린턴은 대통령 전용기를 보냈다.

미국엔 흔한 일이지만 나랏일 보는 이들이 모여 있는 워싱턴에선 특히 의원회관이나 연방정부 건물 및 공원과 도로 등에 역대 인물들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들 상당수가 한때 크고 작은 스캔들로 시달렸지만 후세는 이들의 업적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들의 잘못은 역사에 기록돼 교훈으로 남는다. 매년초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듣는 미국민들은 어김없이 영부인 곁에 자리한 낯선 얼굴에 주목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몇명의 영웅적 시민들을 소개하며 온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미국식 영웅만들기의 소박한 단면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은 한국은 여전히 '네탓이오' 를 외치며 안으로만 기어들고 있다.다분히 바깥세상에 어두워 벌어진 현재의 위기건만 문제풀이에 있어선 안의 잘못을 캐는 데 집착하고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리도 역사의식에 투철하고 지난 잘못을 바로잡는 데 열성이었다고 푸닥거리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때만 되면 이런저런 인사들이 국립묘지를 찾아 선열 (先烈) 앞에 머리를 숙인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죽은 자에게 표경 (表敬)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지난 이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려는 것인지 항시 궁금했다.

살아 있는 이들끼리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흠집내기에 열 올리는 이들이 무슨 낯으로 자신들이 한때 폄하했던 영웅 아닌 영웅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가. 주변에서 영웅을 찾고 또 부족한 인물이나마 서로 받들어 영웅을 만드는 풍토가 자리잡지 않는 한 사람을 유일한 생존수단으로 삼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길정우<특파원>

〈kilj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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