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TV 베끼기]상.일본 프로가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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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 TV의 일본 프로 베끼기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아이디어와 포맷은 물론 대사와 소품까지 베낀다.

우리 시청자는 안방에서 일본 프로를 보고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상문화는 21세기 문화의 기간 축. 그 성패는 독창성에 달려있다.

TV는 영상문화의 기초이자 교두보요, 마지막 보루다.

그런 TV가 독창성을 스스로 포기한다면 우리 문화의 국제경쟁력은 암담할 뿐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앞둔 지금, 저작권 문제로 국제적 갈등을 빚기 전에 우리 TV의 일본 프로 표절 실태와 대책을 짚는다.

"한국에 와서 두 번 놀랐습니다. 처음엔 한국 TV에 일본 방송과 똑같은 프로가 너무 많아서였고 나중엔 한국 사람들이 이런 프로들을 독창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는 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 재일동포 김영실 (27.여.학생) 씨가 밝힌 한국TV의 표절 실태다.

일본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일본 대중문화 개방 소식에 가장 걱정하는 분야는 바로 방송이다.

표절 때문이다.

'이색 도전 별난 대결' (KBS) , '가족 오락관' (KBS) , '휴먼TV 즐거운 수요일' (MBC) , '황수관의 호기심 천국' (SBS) 등 표절 구설수에 오른 프로들을 꼽자면 손가락이 모자란다. 업무차 일본 왕래가 잦은 출판기획사 이플러스 이기선 (29.여) 실장은 이렇게 전한다.

"프로의 구성.포맷 뿐 아니라 세트나 소품, 심지어 웃음.박수 효과음의 타이밍까지 똑같은 프로가 너무 많아요. 소리를 줄여놓고 있을 땐 가끔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예요. " 李실장은 개방 이후를 우려한다.

"아마 일본 프로를 가져다 우리말로 더빙만 해서 방영해도 인기가 꽤 높을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일본 방송에 길들여져 있죠. 몇년 전까지만 해도 2~3년의 시차를 두고 베끼는 것 같았는데 요즘엔 거의 동시에 표절이 이뤄지는 느낌입니다. " 표절의 형태도 다양하다.

아예 일본 테이프를 틀어 놓고 구성.세트.소품을 똑같이 옮긴 프로부터 포맷은 동일하게 가져가며 내용을 약간 바꾸는 수준까지 각양각색이다. 표절 과정 또한 고위 간부가 테이프를 건네며 그대로 만들 것을 지시하는 조직적인 행태와 PD.작가들이 일본 프로에서 본 내용을 베끼는 게릴라식이 공존해왔다.

이러한 관행이 이제는 방송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느 PD의 고백.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일본 프로를 보는 것은 당연한 절차가 됐습니다. " 다른 방송사의 한 PD는 또 이렇게 말했다.

"방송계에서는 시청률만 올라가면 표절 여부와 상관없이 담당 제작진을 인정하는 풍토가 뿌리내렸습니다. " 방송작가들도 "처음 베낄 때는 찜찜한 생각이 들었는데 오래 하다 보니 이제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고 털어놨다.

이런 경우도 있다.

"그냥 얘기할 땐 무시당했던 아이디어를 나중에 '일본 TV에서 본 것' 이라고 하자 반응이 달라지더라" 면서 "일본 것이라고 말해야 오히려 일이 편하다" 고 말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성균관대 신방과 이효성 교수는 "우리 방송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 라고 질책했다.

李교수는 또 "이제 문도 열린 만큼 머지않아 일본에서 지적재산권을 요구해올 것으로 본다" 면서 "한바탕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서야 달라질 것" 이라고 내다봤다.

강주안 기자

〈joo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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