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나라가 불안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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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불과 1년 반 전 사람들은 노무현의 정치에 실망해 그의 정치이념을 계승한 후보를 제치고 현재의 정권을 선택했다. 그것도 500만 표라는 역사상 최대의 표 차이로 말이다. 선거 패배 후 그를 뒷받침했던 정당에서조차 그의 흔적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이러한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이제는 그의 정치적 유산을 받들어야 한다고 표변했다. 정치인들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여기에 지식인들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그에 대한 추모 열기에 놀라서인지 갑자기 노무현 정치에 대한 찬양이 대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지금 다시 노무현식의 정치로 돌아가야 할까.

민주주의는 모든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기 때문에 다중의 지지가 우선이다. 그러나 다중의 지지만 쫓아다닌다면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과 기분에 따라 나라의 방향이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가장 불안한 제도가 될 것이다. 이런 변덕을 막기 위해 민주주의를 뒷받침해 줄 제도가 중요한 것이다. 바람이 어디서 불든, 권력을 누가 잡든 민주사회의 골격을 유지하는 제도가 든든하면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공정한 사법기구, 독립적인 언론기관, 학문을 지키는 대학, 비정치적인 군…. 이러한 기관들이 민주주의를 버티게 해주는 제도들이다. 이런 기관들이 강철 프레임처럼 튼튼하면 권력의 압력에 의해, 혹은 대중의 변덕에 따라 나라가 이쪽저쪽으로 휩쓸리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 제도들이 권력의 힘에 눌려 제 기능을 못했다. 그래서 그때는 민주화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민주화된 지금 역시 이런 기관들이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노 대통령 사건만 해도 검찰이 사법기관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 한 데서 비롯됐다. 전직 대통령을 소환할 정도가 됐으면 소환 즉시 구속 여부를 결정했어야 한다. 정치권에서 뭐라 하든,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든 검찰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어야 했다. 그 기준은 법이었다. 그러나 이 눈치 저 눈치보다 결국 이 꼴이 된 것이다.

지금 정권을 비판하는 쪽은 이 제도들이 권력의 시녀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 해결 방법으로 다중의 힘에 의지하려는 포퓰리즘적 행동을 하고 있다. 제도의 독립을 지켜야 할 내부 당사자들까지도 대중주의적 행동에 물들어 있다. 판사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방송기자와 PD들이 띠를 두르고 법 집행기관과 몸싸움을 벌인다. 대학교수들은 학문 대신 정치적 성명을 발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이 나라가 지금 불안한 이유는 변덕스러운 대중 탓이기보다는 이처럼 각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됐다.

미 대법관 데이비드 수터는 70세를 앞두고 종신직인 대법관 자리를 이번 달 스스로 물러난다. 그는 지난 90년 공화당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았지만 보수주의 노선에 맹종하지 않았다. 그는 공화당 사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얘기를 들어가며 개인의 소신에 따라 진보적 재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록 정치로부터 임명을 받았지만 재판관의 독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워싱턴의 정치판과 사교계를 멀리했다. 유혹을 피하기 위해 그는 매일 점심으로 요구르트와 사과를 싸 와 혼자 먹었다. 미국 사법부의 힘은 바로 대법관의 이런 자세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 민주적 제도들이 타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리 욕심 때문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힘 있는 자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기능에 눈을 감는 것이다. 성숙한 민주사회가 되려면 소위 엘리트라는 사람들부터 자리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직들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용기는 직업윤리를 지키는 것이다. 언론인이라면 저널리즘의 윤리를 지켜야 하고, 재판관은 재판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권력과 금력의 유혹, 포퓰리즘의 압력을 떨쳐내고 자기 직업에 충실하려는 책임감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고는 한국은 언제까지나 불안한 사회로 남아있을 것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