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보고 세로읽기]자연을 다림질 하는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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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득 20여 년간 살았던 나의 옛집이 그립다.겨울엔 유난히 추웠던 내 방과 꽃밭이건 채마밭이건 잡초 무성했던 집.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가꾸는 일을 대신하였다. 시멘트 틈 사이로 핀 민들레.강아지풀.질경이도 그대로 놔두었다.내 키만했던 채마밭 담장가에 널린 쑥 - .

허허로운 풍경 속의 하루는 참으로 느리게 흘러갔고, 저녁 무렵의 잡초가 주는 가난함과 쓸쓸함에 가슴 저릴 때도 있었다. 그 느낌이 인생의 바탕색이며 밭에서 거둔 벌레 먹은 무공해 배추와 오이가 생명의 원천임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그 집을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나는 그 집에서 야생화의 자라는 속도에 놀라곤 했다.

그 왕성함은 아마도 그리움일 것이다.잡초는 무엇을 그토록 그리워했을까. 그리움은 하나의 정열이다.생의 허망함을 뚫고 나가는 힘일 것이다.

문득 2년 전 동네 재개발아파트에 걸린 플래카드가 생각난다. "서민은 영원히 서민으로 사느냐. " 그게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잡초를 대할 때처럼 가슴이 저며왔다.발언은 무력했지만 가혹한 세상을 뚫고 나가는 생명력이며 서민들의 눈물이리라. 현재의 IMF시대는 서민의 목을 조여매는 형상이다.내 주변의 퇴직자와 부도난 사업가의 가족들을 보면 안타깝다.

현재의 어려움은 정경유착 등 부정부패로 찌든 사회풍토가 큰 원인이나 내 탓이려니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그러면 한심했던 정치와 경제개혁을 위해 폴 드 노이어 (Paul de Nooijer, 네덜란드, 1943~) 의 사진 속에 잠시 바람처럼 머물자. 작품으로 세상은 더 잘 보일 것이다.

노이어는 디자인을 공부한 사진가로 엉뚱한 세계를 사진과 단편영화에서 표현했다.들판을, 아니 자연을 다림질하는 사람. 재미있는 상상력과 기지가 몽타주 기법으로 처리된 사진이다.창밖의 정제된 풍경은 인간이 원하는 조건으로 자연을 바꿔놓는 것에 대한 풍자 아닐까. 인위적인 아름다움의 추구에 빠진 인간의 삶은 이 시대를 더 힘들게 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뿌리깊은 외양중시 풍조의 공허함을 읽는다.자연은 그의 인연에 의해 돌아가게 마련 아닌가.그냥 내버려 둘수록, 욕심을 버릴수록, 있는 것 아껴 쓸수록 사람의 정열은 내면의 풍요로움을 위해 쓰일 것이다.

잡초와 야생화가 산과 들 굽이굽이 물결친다.사람들과 더불어 울리라, 사람들과 더불어 춤추고 노래하리라, 그렇게 외치며 너울거린다.마음이 괴로운 자들이여. 환한 불빛은 가난한 마음에서 켜지나니. 상실한 것으로 괴로워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면 기쁨이 오리라.

신현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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