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남북대화를 반기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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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워싱턴에서 남북문제를 보고 있는 한국인들은 요즘 격세지감 (隔世之感) 을 맛보고 있다.지난날 인기없던 한국정부의 대북 (對北) 정책이 제 가닥을 잡아가고 있어 미국내 한반도 전문가란 이들 어느 누구도 한국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흠잡는 이가 없다.

취임 직후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는 대북조치들에 다소 우려하던 미국의 보수인사들조차 새 정부의 통일부장관이 최근 조심스레 언급한 "북한 반응을 보아가며 단계적인 대북지원에 나서겠다" 는 대목에 안도하고 있다.워싱턴내 한반도 논의 분위기가 바뀌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역시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 대통령의 정치적 의지에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한 '북한 연착륙론' 에 대한 신뢰도 한몫하고 있다.적어도 미국내 상당수 인사들은 우리와 다소 입장차이는 있다 해도 한반도내 급변사태를 조장하는 짓은 금물 (禁物) 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측이 4자회담에서 보인 경직된 행태가 모두의 비아냥거리가 된 것도 한국정부에 힘을 실어주자는 주장이 커지게 된 또다른 이유다.

그동안 남북한과 미국간의 '한반도 삼각관계' 흐름을 돌아보면 남북관계에 진전이 없는 가운데 북.미 (北美) 대화가 이뤄지면서 한국의 우려와 의혹을 낳곤 했다.북.미 접촉 후 미국을 통해 정황을 파악하려 애쓰던 우리 관리들의 딱한 모습은 적어도 남북대화가 재개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실속이 있든 없든, 또 공개접촉이든 정부당국자간의 비밀접촉이든 남북간에 대화가 지속되는 한 미국이 한반도문제를 주도한다는 우려는 불식될 수 있다.우스꽝스런 얘기지만 남북관계는 내실과 무관하게 형식논리가 지배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남북관계에 조그마한 돌파구라도 마련되면 더없이 좋은 일이나 어차피 북한이 내부사정으로 주춤하는 처지라면 때로는 형식적인 대화라도 의미가 있다.4자회담의 부침 (浮沈) 도 마찬가지다.

한국정부가 남북대화에 무게를 싣고 북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제안들을 내놓으면서 대화의 여지를 넓혀간다면 4자회담에 임하는 한국의 입지도 여유를 찾을 수 있다.4자회담이 남북대화의 가능성을 넓혀 줄 것이라던 미국측의 논리는 우리의 널뛰는 대북정책 때문에 미국의 불필요한 미움을 자초한 데서 비롯된 점도 있다.

이제 거꾸로 남북대화 지속이 4자회담 분위기 조성에 기여한다는 주장이 미국인들 사이에 다수견해로 자리잡을 날을 기대해 본다.

길정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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