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6. 일본과 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역사의 수레바퀴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유연히 굴러갔다. 유럽에서는 이미 독일과 이탈리아가 망하고, 태평양 곳곳에서 일본군 연합 함대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 사이, 일본의 전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가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여세를 몰아 필리핀에 상륙, 맥아더 장군 휘하에서 오키나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미군함에 자폭 공격을 하고 옥쇄(玉碎)정신을 뿌려보지만, 기울어진 전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나고야는 이미 전소되다시피 했고, 도쿄도 오사카도 다 잿더미가 됐다.

어느 날 지타 반도에서 돌아오던 나는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들판에는 B29가 뿌리고 간 삐라가 날아다녔다. 주어 보는 순간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재촉하는 문구들. 포츠담 선언이니 카이로 선언이니,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약조까지 있지 않은가. 가슴이 떨렸다. 드디어 여기에 이르렀는가. '조선 독립!' 얼마나 갈망하던 우리들의 꿈인가.

내무반으로 돌아오자, 나는 신경희와 천응렬을 데리고 반공호로 들어갔다.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주었더니 천응렬은 입을 딱 벌린 채 눈만 껌뻑이고 신경희는 "햐아! 드디어 우리들의 세상이 오는구나! 웬 떡이냐!"소리를 질렀다.

내무반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도맡아 나를 괴롭히던 모리가 불렀다.

"기분 좋으냐?"

"…"

"너는 사이판.유황도가 옥쇄했을 때도 좋아했지?"

"…"

"조선 독립,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거지?"

"…"

"그러나 착각 말아라. 일본은 항복 안해! 코쟁이들이 오면 죽창으로라도 싸울 거야. 그것이 야마토다마시(日本魂)이라는 거야. 알겠니?"

며칠 후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또 하나 떨어졌다. 일대가 완전히 초토화되는 위력이라고 했다.

8월15일. 천황의 항복 선언. 동작이 느린 천응렬은 장기판을 만들었다. 도쿄제대 출신 나카무라가 가세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따스했다. 1억 총 돌진이라고 했지만, 나카무라 같은 사람, 일본에 또 얼마나 많을까. 그들은 군국주의에 눌려서 복종하고 사는 습성에 젖어 있었을 뿐.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고 한달 뒤에 조선출신 학도병들은 고향으로 떠날 수 있었다. 9월 15일. 휘황한 달밤에 우리는 역으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탔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카무라였다. 당시 그의 모습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인간의 내일, 당신 같은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안녕 나카무라 일등병!

일본도 안녕!

한운사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