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변칙적 자본조달 규제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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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금융기관들이 자기자본비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규모 증자를 실시하거나 후순위채를 발행하는 일이 빈번해졌다.후순위채는 부도가 났을 때 일반채권에 비해 변제순위가 늦어 자기자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금융기관들이 앞다투어 발행했다.

3월말 현재 제일.서울은행 각각에 대한 정부의 1조5천억원 출자를 비롯해 7개은행이 4조원, 11개 종금사가 1조8천억원, 6개 증권사가 약 1조원을 유상증자로 조달했다.예를 들어 L종금의 경우 9개 계열사들과 L종금으로부터 돈을 빌려쓰고 있는 D산업 등 비계열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시세가 액면을 밑도는데도 액면 증자를 감행, 발생한 실권주를 계열사에 떠넘긴 것이다.L종금 고객들은 대출금 회수 압력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응했다는 소문이다.

스스로 한푼이 아쉬운 때 '울며 겨자먹기' 로 부실 금융회사에 수십억원 또는 수백억원씩 털어넣은 것이다.한 기업의 부실이 다른 기업에까지 전염될 수 있는 대목이다.

후순위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고려.동서를 제외한 20개 증권사가 2월말 현재 발행한 후순위채 총액은 1조8천억원. 이중 S.L.H증권은 각각 2천억원 이상 후순위채를 발행했는데 대개 그룹내 계열사들이 끌어안았다.

문제는 돈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요즘 세상에 계열사들은 어디서 그 많은 자금을 조달했는지 궁금하다.일부는 실질적인 현금납입이 없는 '변칙증자' 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칙적으로 해당 기업이 결정할 문제지만 이렇게 증자나 후순위채에 참여한 기업들이 대부분 상장돼 있어 결국 소수주주의 이익이 침해당할 수 있다.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언제까지 무슨 비율 몇 %' 만 내걸면 정부가 할 일은 끝이라는 식의 당국의 구태의연한 태도와 어떡하든 이 순간만 넘기고 보려는 기업의 대응자세 때문이다.

자기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하면 영업정지 같은 당국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 해당 금융기관의 입장에선 작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이런 변칙이나 생각해내는 정신으로 당면한 위기를 헤쳐나가기는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신한은행이 제일종금에 대한 유상증자를 포기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계열사 개수로 그룹의 세 (勢) 를 과시하던 시절엔 생각도 하지 못한 결정이다.경영의사 결정이 그룹전체보다 개별기업 단위로 이뤄진다는 본보기를 보인 셈이다.

권성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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