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은의 세상풍경]잘 가거라 우리들의 헐랭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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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전 어디론가로 떠나보낸 이름, 헐랭이. 금방 아실겁니다.

애완견에 반사적으로 두드러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들껜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앞세워야겠군요. 만 3년전 헐랭이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의 일대 소동이 먼저 떠오릅니다.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울부짖던 울음소리. 둘째 아이는 행여 긴급 반상회에서 추방명령이 떨어질까봐 헐랭이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더랬습니다.

아파트에 가둬놓은데 대한 복수 같은 것이었을까요. 헐랭이는 야성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말았습니다.

운동화.구두.소파.장롱.도자기.조각품…제대로 남아나는 게 없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장난 아니게 나가는 병원비.미용비도 별로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바로 얼마전에 말입니다.

아이는 유치원을 끊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의미는 몰라도 IMF를 발음하며 '갑작스런 재난' 을 말할 줄 아는 게 다행이더군요, 아무도 얘기를 먼저 꺼내진 않았지만 걱정은 산더미로 쌓여 갔습니다.

다음 순서는 자명했거든요. 어느날의 늦은 퇴근길, 문앞에 쓸쓸하게 나붙은 '학습 사절' 딱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는데도…아무 소리가…아, 헐랭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어둠이 덮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헐랭이가 어느 막다른 골목길에서 웅크린 채 자고 있을 것 같더군요.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을까요. 야산에서 쓰레기장에서 잃어버린 야성을 키우고 있다가 훗날 다시 달려올 거예요. 그날이 오면 아이에게도 수많은 얘기를 털어놓을 거예요. 그리운 헐 - 랭 - 이.

그림=최재은<명지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글=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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