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국민정서에 메달리는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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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민정서' 라는 말이 있다.

쉽게 흥분하지만 그만큼 쉽게 감동하기도 하는 우리 국민들. 그러다보니 모두들 그런 정서를 거스를 일은 되도록 피해가는 대신, 적당히 어루만져주는 쪽으로 일을 벌이려 드는 게 한국적인 (?) 현실이다.

나라살림을 이끌어 가는 정부 역시 매한가지다.

당장 욕을 먹더라도 소신있게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국민정서에 영합하는 정책들을 풀어놓곤 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서 그 문제를 감추는 데만 급급한 '눈가리고 아웅식' 미봉책들이 난무했던 건 그런 이유다.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맞아 갖가지 난제 (難題) 들을 차근차근 풀어가야 하는 지금. 하지만 여전히 적잖은 정책 당국자들은 바로 그 국민정서라는 족쇄에 발목이 잡혀있는 듯해 안타깝기만 하다.

최근에 쏟아져 나온 실업 관련 대책들만 해도 그렇다.

당초 모부처에선 돈을 확보할 방법도 마련치 않은 채 10조원이니 20조원이니 실업재원을 마냥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말 정부가 나서서 도와줘야 할 실업자 숫자는 어느 정도고, 어떤 구제방법에 따라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는 파악도 없이 무조건 실업재원 확대 방침부터 발표한 건 국민들 기분이나 맞추고 보자는 발상이 아니었을까. 해프닝 (?) 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5천만원 이상 예금계좌에 실업세를 부과하겠다던 것은 여론몰이식 정책의 대표적 사례였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이 고통분담해야 하는 것 아니냐" 는 다분히 감정적인 차원의 이 방안은 예금이탈 가능성 등 부작용이 지적되자 은근슬쩍 '없던 일' 로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비실명장기채권을 발행한다, 공무원봉급을 일률적으로 깎는다, 실직자돕기 성금모금 운동을 전개한다…. 그후로 고심 끝에 나온 재원조달 방법들 역시 실효성보다는 국민정서 다독거리기 쪽에 무게가 더 실려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루빨리 정부가 뭔가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데 우린들 어쩌겠습니까. " 며칠 전 책 한권은 족히 될 분량의 실업종합대책이 발표된 뒤 구체적인 실행시기나 절차를 캐물었을 때 실무 공무원들은 난감해하며 이렇게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이제 정말 가슴이 아닌 머리로 정부가 하는 일들을 따져볼 때가 된 것 같다.

앞으로도 정책 결정자들이 국민정서를 제1의 잣대로 삼는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예리<경제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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