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개혁 독촉' 김대중대통령대신 나선 박태준총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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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3일 박태준 (朴泰俊) 자민련총재와 손병두 (孫炳斗) 부회장 등 전경련 임원진의 만남에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의중이 깊숙이 배어 있다.

金대통령은 지난 21일 朴총재와의 주례 회동에서 금융부문과 재계의 양대 개혁에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는 점을 거론하며 朴총재가 직접 나서 문제를 챙겨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 朴총재의 방문은 金대통령의 그같은 뜻에 따른 것이다.

면담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朴총재는 "정주영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전경련 회장시절 부회장을 했다" 고 말문을 연 뒤 "7년만에 방문하니 감회가 깊다" 는 말로 친근감을 전했다.

하지만 朴총재가 전한 메시지는 간단치 않아 보인다.

그는 기업구조조정의 속도가 늦다는 점을 지적한 뒤 "재계 구조조정과 기업 회생은 기업 총수들이 어떤 자세와 의지를 갖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고 강조했다.

또 "지난번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간 합의한 구조조정계획을 서둘러 실천해달라" 고 주문했다.

특히 朴총재는 은행권의 협조융자 및 계열기업간의 지원을 통한 '한계기업 붙잡기' 의 문제점을 강도 높게 지적했다.

이는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상황을 마냥 지켜보고 있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관심을 끄는 또다른 대목은 朴총재가 그룹 총수들이나 전경련회장단을 제쳐두고 실무진이라고 할 수 있는 부회장 이하 임원들을 만난 것이다.

또 당분간은 10대그룹 총수들과의 면담도 잡혀 있지 않다.

여권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朴총재가 회장단 대신 부회장을 만난 것은 새 정부가 전면에 나서 재계 구조조정 작업을 강제로 끌고 가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은감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가 제도를 통해 기업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 반면 정치권이 이를 채근하고 독려하는 강온 (强穩)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朴총재는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 재계의견을 청취하고 좋은 의견은 언제라도 정책으로 채택하겠다" 는 말로 재계와 새 정부의 창구역할을 할 뜻을 구체화했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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