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때 못마춘 금융계 일본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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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일은행장과 산업은행 부총재가 최근 일본에 들렀다.

정기 주총을 끝낸 주택은행장 등도 줄지어 '인사차' 방일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3월말 결산을 앞둔 일본 금융기관들은 난감한 표정들이다.

"차라리 4월에 왔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어차피 신규 대출을 부탁할 바에야 주는 쪽의 입장이 좀 편할 때 들르는 게 예의가 아니냐는 것이다.

일본 금융기관의 한국담당 실무자들의 불만은 대단하다.

한 마디로 일본을 너무 무시한다는 것이다.

뉴욕 협상에서 결정된 단기 외채의 중.장기 전환 개시일 (4월8일) 이 대표적 사례다.

부활절 휴가 직전인 이날을 택한 것은 미.유럽 은행의 담당자들이 홀가분하게 휴가를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일본은 이달말 결산일까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에 따르면 대한 (對韓) 단기채권 위험률은 20%.그러나 한국 정부의 보증이 붙는 중.장기 채권으로 전환될 때 위험률은 0%로 낮아진다.

전환개시일을 열흘정도 앞당겼다면 일본 입장은 훨씬 편해졌을 것이다.

일본은 이같은 사정때문인지 한국에 대한 1백억달러의 협조융자를 약속해 놓고도 팔짱을 끼고 있다.

반면 똑같이 금융위기를 겪는 인도네시아에는 3천억엔의 무역보험과 엔차관 제공 등 실질적 지원조치에 나섰다.

한국은 "우리가 모라토리엄 (지불유예)에 들어가면 일본도 무사하지 못할 것" 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 쪽에서는 "한국 경제가 파산해 2백37억달러의 대출금을 모조리 떼인다 하더라도 고작 2조8천억엔 정도의 불량채권이 늘어날 뿐" 이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전체 불량채권이 70조엔이 넘는데 그 정도는 별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경영인 체제의 일본 금융기관은 실무진의 판단을 존중한다.

특히 일본 금융실무자들은 성과급을 받는 미.유럽의 펀드매니저와 달리 단순한 샐러리맨에 불과하다.

굳이 리스크를 무릅쓰고 한국에 투자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지난 두달 동안 일본 돈이 좀처럼 서울로 들어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이 세심하게 금융외교를 펼쳐야 할 최대 채권국은 일본이다.

일본 금융실무자들의 대한 (對韓) 시각이 차가워지는 것은 여간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철호〈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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