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북한 개성공단 계약 무효 선언 터무니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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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북한이 어제 개성공단과 관련한 기존 계약의 무효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토지임대료·임금·세금 등과 관련해 자신들이 앞으로 새로 제시할 계약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이란 것이다. 수용할 의사가 없으면 공단에서 철수해도 좋다고도 했다. 임대료나 임금을 얼마로 올리든 찍소리 말고 따르든가 싫으면 나가란 소리니 최소한의 상식조차 무시한 억지 주장이다. 계약은 쌍방의 합의하에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북한은 삼척동자가 보기에도 어이가 없는 주장을 그만두고, 남측과 협상을 통해 합리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북한이 어제 이 같은 입장을 담은 통지문을 개성공업관리위원회를 통해 남측에 보낸 것은 개성공단에 억류 중인 유모씨 문제를 남북 실무접촉의 의제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분명한 의사 표현으로 보인다. 북한은 통지문에서 유씨를 “현대아산 직원 모자를 쓰고 들어와 우리를 반대하는 불순한 적대행위를 일삼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는 자”라면서 “개성공단 계약 조건을 협의하기 위한 실무접촉의 전제조건으로 유씨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북남 접촉을 또 하나의 북남 대결장으로 만들려는 고의적 도발행위”라고 주장했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어느 정부나 국민의 생명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북한에 억류돼 47일째 접촉조차 안 되고 있는 국민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밝힌 대로 근로자의 안전 문제는 개성공단의 본질적 문제이고, 따라서 정부는 유씨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로 개성공단이 기어이 문을 닫는 사태는 남북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북한이 터무니없는 임대료와 임금을 요구할 경우 채산성을 무시한 채 개성공단에서 버틸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적정선에서 남북 간에 타협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걸림돌은 유씨 문제다. 유씨 문제를 방치한 채 개성공단건만을 놓고 협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유씨 문제를 별도의 채널을 통해 논의키로 확실히 보장한다면 개성공단 계약조건을 분리해 협상하는 방안까지는 고려할 수 있다고 본다.

정부가 북한의 일방적인 계약 조건 무효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힌 것은 당연하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의 절차와 합의는 필요하다. 북한은 당장 다음 주에라도 남북 실무접촉을 재개해 계약 조건 협상에 응해야 한다. 개성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3만9000명의 북한 주민들이 바라는 바도 그것일 것이다.

북한은 개성공단과 관련한 남측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우리의 인내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우리의 끈질긴 설득과 노력에도 북한이 기어이 판을 깬다면 결국은 공단 문을 닫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북측 근로자들과 남측 기업들이 볼 피해와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은 전적으로 북측에 있음을 북한은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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