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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파병 논의의 전제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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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2003년 9월 워싱턴.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을 만난 윤영관 당시 외교부 장관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이 같은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파월은 “한국 정부가 파병 여부와 북핵 문제를 연계하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이건 동맹국을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고 쏘아붙였다. 회담은 까칠한 분위기 속에 성과 없이 끝났다(이수혁 전 국정원 1차장 ‘전환적 사건’).

지난해 4월 이명박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회담을 하기 전 미국의 쇠고기 시장 개방 요구를 화끈하게 받아들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성사를 위해 미국 측에 미리 내놓은 ‘선물’이란 해석이 많았다. 하지만 회담 뒤 1년이 지나도록 FTA는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만 촛불시위에 시달리고,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비싼 대가를 치렀다. 두 개의 사례 모두 동맹의 금과옥조인 ‘신뢰’보다 눈앞의 계산에만 매달린 데서 빚어진 것이다.

다음 달 16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가장 큰 의제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최대 과제인 아프가니스탄의 전황은 날이 갈수록 미국에 불리해지고 있다. 올 초부터 10일까지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 전사자는 100명에 육박한다. 미군 사령관들은 최소한 1만3000명의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건의했지만 오바마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오바마는 이들 병력을 동맹국들의 파병으로 보충할 생각이라 하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대통령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주고받을 건 파병과 FTA, 혹은 대북정책을 연계한 ‘빅딜’이 아니라 ‘신뢰확보’다. 동맹의 진화를 통해 60년 우의를 새롭게 굳혀갈 것임을 확인시키는 게 핵심이다. 아프가니스탄 해법은 그 뒤 양국 실무자들이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며 도출해 갈 문제다.

무엇보다 이 대통령이 신경 써야 할 대목은 정치권, 특히 야당과의 소통이다. 정부는 지난해 여론청취를 생략한 채 일방적으로 쇠고기 협상을 밀어붙여 반발을 자초했고, 야당은 무책임하게 촛불시위에 편승해 국익 훼손에 앞장섰다. 이번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파병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야당으로 대표되는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야당도 집권 시절 국익을 위해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한 사실을 기억하고, 열린 자세로 협조해야 한다.

의원들 개개인도 여야를 막론하고 미국 관리·정치인들을 만나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심을 보여줘야 한다. ‘의원 외교’로 이만큼 의미 있는 일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안타깝다. 10일 현재 유럽·아시아·아프리카로 떠난 의원은 100명이 넘지만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쏟는 의원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순방을 ‘의원 외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라의 중요한 현안에 눈감은 여행은 ‘의원 외유’에 그칠 수밖에 없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