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어딘가에서 친부모님이 보고 있겠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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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드니 성호 얀센스는 ‘정석대로’ 연주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자신의 본능에 따라 음악을 조이고 푸는 데 능숙하다. 스스로 “전형적인(typical) 연주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박종근 기자]

클래식 기타리스트 드니 성호 얀센스(34)는 이화여대 어학당 한국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간단한 읽기와 인삿말, 자기소개하는 법 등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일종의 뿌리찾기라고 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다. 1975년 남포동 부산시청 앞에 난 지 사흘 만에 버려졌다. 같은 해 11월 “우유를 좋아한다”는 설명 한 줄과 함께 벨기에로 입양됐다. 은색 케이스에 넣은 기타를 메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얀센스는 “밝은 분위기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친부모 찾기에 실패한 그는 나지막하고 고즈넉한 자신의 기타 음색과 섞여 주로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오곤 했다. “찍는 사진마다 어둡다”고 말한 그는 기타를 들고 간혹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다른 아이=얀센스의 어린 시절은 “어리둥절하게” 지나갔다고 했다. 그가 입양된 벨기에 작은 마을엔 한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어딘가 다르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게 뭔지 몰랐다. 돌이켜보면 나는 침대 밑 바닥에서 잠을 잘 잤고, 양부모님이 먹지 못하는 매운 음식도 꽤 먹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랐다”고 했다.

10대 시절을 그는 화가 난 채 보냈다. “친부모는 왜 나를 버렸고, 양부모는 나를 왜 데려왔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없어서”였다. 독일에서 이름을 날리던 축구선수 차범근 얘기를 들은 후 ‘한국’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된 그는 정신없이 자료와 책을 뒤졌다. 자신이 버려질 당시 어렵던 한국 경제 상황과 수많은 입양 사례를 알게 됐다. “그때 조금은 용서하게 됐다”고 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음악이 도움이 됐느냐”고 물었다. 얀센스는 “버려졌다는 느낌은 나도 모르는 내 뇌 어디엔가 상처를 분명하게 남겼다. 음악이 치유했다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음악에 그런 내 상처가 묻어나는 것은 맞다”고 답했다. 그는 14세 때 벨기에 음악경연대회 입상을 시작으로 29세에 유럽 콘서트홀 협회의 ‘떠오르는 스타’에 선정됐다. 세계 각지 공연장에서 한해 40여회 연주를 소화하고 있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다.

◆기타는 늘 함께하는 친구=얀센스의 상처를 알아준 첫사랑은 기타가 아닌 피아노였다. 체육 교사였던 양아버지 피에르 얀센스는 여름마다 그와 함께 프랑스 휴양지를 찾았다. “다섯살 때 프랑스에서 우연히 본 피아니스트에게 반했다. 무조건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피아노를 배우지도 않은 채 소음만 내며 하루종일 건반을 두드리곤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양부모는 피아노에 비해 싸고 간편한 기타를 건넸고, 여덟살부터 그에게 기타는 당연히 늘 함께하는 친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마르타 아르헤리치 같은 피아니스트를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로 꼽는다.

얀센스가 처음 한국 무대에 선 것은 2006년이었다. “부모를 찾겠다”며 한국 땅을 밟은 때였다. DNA 대조작업까지 거치는 과정 끝에 결국 실패했다. 이제 그는 “더이상 찾고 싶지 않다. 우연히라면 몰라도…. 몸을 뒤져 증거를 찾는 일에 지쳤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얀센스는 “한국에서 연주할 때마다 혹시 부모님이 와계실 수 있다는 생각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최근 낸 앨범 ‘회상’에는 이처럼 힘을 뺀 기대와 실망, 용서가 들어있다. ▶20일 오후 8시 마포아트센터/02-3274-8600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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