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한보 1년이 주는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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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년전 한보의 부도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단초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사태를 예고한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부도난 기업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경제의 처리능력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한보사태는 오래된 정경유착 관행이 곪아 터진 것이고, 사법적으로 보면 이른바 몸통은 다 빠지고 그야말로 은행장 몇명만 남아 책임을 지고 있는 궁색한 모양으로 끝났다.

역시 더 큰 의미나 교훈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한보사태 발생 초기에 파산된 기업을 재빨리 시장에서 매각하고 은행의 부담을 덜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보처리를 질질 끌면서 부담을 은행에 지우는 것이 전례가 되자 그 이후 연속적으로 무너진 대기업이 모두 같은 길을 걸었고 그 결과 금융기관의 신용창출력은 급격히 하락하고 종국에는 부실종금 문제와 맞물려 국가적인 외환위기로 증폭됐다.

한보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부실기업의 처리는 청산을 하든 제3자에게 매각하든 신속, 투명하게 처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필연적으로 경쟁구도이기 때문에 언제나 경쟁에서 탈락한 패자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기업파산의 발생 그 자체보다 사후적으로 얼마나 신속히 뒤처리를 하느냐로 시장의 효율성이 가름된다.

그같은 기본원리가 작동해야 사전적으로 기업 - 투자자 - 금융기관의 균형과 견제의 힘이 작동하고 근본적으로 기업의 과다차입과 방만한 투자가 시정된다.

한보가 무너졌을 때 우리는 바로 이 평범한 사실을 망각하고 거대기업의 도산이 미치는 단기적 충격에만 신경썼다.

지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는 충분히 교훈을 받은 것 같지 않다.

당장 한보 뿐 아니라 기아나 부실화된 모든 기업이 인수.합병 (M&A) 시장에서 처리돼야 한다.

그 길만이 궁극적으로 금융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러자면 각종 규제를 없애 제도적으로 그같은 구조조정이 빨리 이뤄지게 도와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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