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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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때는 황홀했던 서울의 모든 걸 차제에 툭 털어버릴래. 우연이긴 했지만, 이미 떠나와 버린 곳이잖아?” “길은 길과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 말도 관념적인 수사에 불과한 것이지. 여기서 서쪽으로 가보았자, 마주치는 것이 바다이긴 마찬가지야. 나도 여기 와서야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이지만, 양양에 있는 물치리란 곳이 할아버지 고향이거든.” “비벼댈 언덕을 발견했다는 얘깁니까? 그런 궤변이 어디 있어요.” “그만 두자구. 벼랑 아래로 뚝 떨어진 놈이 그나마 할아버지 고향을 찾았다는 것도 큰 소득이라고 생각해야지. 별거 있나, 명분이란 게 그런 거지 뭐.” 어느덧 술청을 가득 메웠던 술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사위는 바닷속처럼 조용했다.

끝까지 남아 있을 성불렀던 변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승희만 조용조용 남기고 간 식탁의 잔반 (殘飯) 들을 치우고 있었다.

강성민은 바닷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유인했지만, 승희가 만류하고 나섰다.

등골을 휘게 만드는 끈끈한 취기를 쉽사리 뿌리칠 재간이 없었던 그들이 승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 몸을 누인 것이 새벽 3시였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에야 철규는 눈을 떴다.

성민은 보이지 않았고, 방 윗목에 냉수 한 그릇만 휑뎅그레하게 놓여 있었다.

눈을 뜬 채로 한동안 죽은 듯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술청의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변씨였다.

대낮부터 취기가 있는 그를 뒤따라 술청을 나설 때까지 승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하찮은 일로 변씨를 충동질할까 해서 입을 다물었다.

“어제 왔던 그 환쟁이 강선생 말인데…, 요즘 같이 되바라진 세상에선 꽤 쓸만한 종잡디다.

한선생을 아끼는 심덕이 기특해서 내가 정류장까지 따라가 전송해 주었소. 여기 있을 동안만이라도 한선생을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소.” 왼편으로 수산시장의 건어물 가게가 보이기 시작하는 해안도로의 초입이 먼발치로 바라보이는 골목 어귀에 이르자, 변씨는 갑자기 허리를 비꼬며 와락 담벼락 아래로 기어들었다.

그리고 불문곡직하고 좌르륵 토악질을 해댔다.

담벼락 아래에 푸짐한 토사물을 쏟아낸 다음, 소매로 입 언저리를 쓱 문지르고 돌아서던 그가 느닷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씨발…, 미국놈들 딸라 빌려다 맥끄날도 사먹고, 일본놈들 엥화 빌려다 각기우동 사먹으면, 포주돈 빌려다 갈보 끼고 자는 것과 하나 다를 게 없지. 씨발…, 그게 바로 먹은 것 게워내고, 게워낸 것 도루 퍼먹는 꼴이고, 아랫돌 빼어 윗돌 괴고, 윗돌 빼어 아랫돌 괴는 꼴이지. 얼은 빠지고 고깃덩이만 남은 놈처럼 밑 빠진 독에 하염없이 물 붓다 보면, 미주알은 원숭이 새끼처럼 저절로 빠지고 등뼈만 휠 것이니, 집구석에 망조 드는 것은 시간 문제라 이거요. 한선생은…, 니 팔자나 내 팔자나 이불담요 깔겠나, 마틀마틀 장석자리에 깊은 정 들자. 아라리 아라리 아라리라는 정선 아라리 알구 있나? 수 백년 동안 아라리에서만 맴도는 정선 아라리가 공연히 생겨난 줄 아시오? 모두 저들끼리만 돌려가며 해먹는 요즘 놈들 두고 하는 말이지 씨발….” “그래서 게워낸 것 도루 먹을 거요?” “내가 미쳤다고 도루 퍼먹어? 개새끼들이 핥아 먹겠지.” 그들은 남쪽으로 뚫린 해안도로의 갓길을 따라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오랜만에 바다 위로 맑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해안의 바윗돌 위로 갈매기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내려앉고 있었다.

해안도로를 겨냥하고 늘어선 건어물 상가의 장옥 (長屋) 들은 꽤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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