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자존심보다 버는 자부심" 교사서 구두수선공 변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인생은 길고 직장은 짧아. 자존심을 버리면 뭐든 할 수 있는 게 사람이야. 실직했다고 낙담만 하고 있으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정리해고하는 꼴이지.” 21일 오후 경기도과천시별양동 교보빌딩 옆 구두수선가게. 2평도 채 안되는 조그마한 공간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웅크린 자세로 헌 구두를 고치고 있다.

박춘식 (朴春植.73) 씨. 가죽과 바늘.가위 등을 다루는 솜씨가 평생을 구두와 함께 살아온 것처럼 능숙하지만 그의 전력은 뜻밖에도 교사와 회사 임원. 함경북도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4후퇴때 월남한 朴씨는 서울대사대 체육교육과 교사양성과정을 수료, 충남에서 교편을 잡았다.

대천.홍성중에서 10년동안 학생을 가르치다 세 자녀의 교육을 위해 상경, 모 화물운송회사에 취직, 81년 상무이사로 정년퇴직했다.

“할 일 없이 지내려니 건강도 나빠지고 답답했어. 이것 저것 일을 찾다가 구두수선을 하기로 했지. 자식들이 완강하게 반대했고 자존심도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내 인생이잖아.” 집안에 있는 헌 구두를 몽땅 들고 수선가게를 찾아가 어깨너머로 보기도 하고 구둣방을 찾아가 젊은 수선공들에게 기술을 배워 朴씨가 제3의 직업을 시작한 것은 63세때인 87년. 서울홍제동에 수선가게를 냈다가 90년 과천으로 이사한 뒤 7년째 현재 장소에서 일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 덕분에 朴씨는 요즘 일감이 부쩍 늘어 손에 굳은 살이 더 배겼다.

전에는 손님들이 대부분 주부였지만 요즘은 학생.공무원.회사원까지 집안에 처박아 놓았던 헌 구두를 고치러 오기 때문이다.

“알량한 자존심 팽개쳐버리기를 잘했지. 일이 돈보다 중요한 것 아니겠어. 요즘 IMF다, 뭐다 해서 실업자들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생각만 조금 바꾸면 기회는 있어.” 朴씨는 20년동안 회사생활을 해 요즘 직장인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며 이제는 박제된 듯이 한 직장에 모든 것을 거는 직업관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사뿐사뿐 걸어 구두 앞바닥이 주로 다는데 발걸음이 무거워진 요즘은 구두 밑창 전체가 달아. 또 지난해만도 맡겨놓고 찾아가지 않은 구두가 30 켤레나 됐는데 올해는 하루만에 다 가져가지. 이게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야. 구두처럼 우리 경제도 일찍이 손을 보면 괜찮았을 것을….” 10년간 망치를 두드리다 보니 朴씨는 구두를 통해 세상을 보는 '구두 경제박사' 가 됐다.

“허영에 불과한 자존심을 버려야 해. 쓴맛을 기회로 생각하고 자신감으로 부닥쳐야지. 그러면 결코 인생이 해고되는 일은 없어.”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일에 묻혀 사는 朴씨가 IMF 실업시대를 맞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생철학이다.

양영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