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김종길 시집 '달맞이 꽃' 시론집 '시와 시인들'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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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퇴근길 무던히 지쳐/버스에서 내려서 접어든 골목, /과일가게며 채소가게며 생선가게 앞/길바닥에 앉아 순대나 콩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들, /…/벌어먹고 사는 길도 가지가지 - /…/노동력도 상품이라면/나 자신이 바로 상품 아닌가!

/정년을 코앞에 두었으니, 그것도 폐품 직전의 상품. /저 생선가게가 팔다 남긴, /꽂이에 꿰인 비쩍 마른 북어 (北魚) ./그 감지도 못한 흐릿한 눈깔에 얼비친/겨울 하늘, /찬바람 이는/해질녘 겨울 하늘.” 원로 시인 김종길 (金宗吉.72) 씨가 시집 '달맞이꽃' 과 시론 (詩論) 집 '시와 시인들' 을 최근 민음사에서 함께 펴냈다.

1947년 시단에 나와 지난 86년 회갑기념으로 펴낸 시전집 '황사현상' 에 실린 시는 75편. 한 해 두편 꼴을 발표할 정도로 金씨는 자신의 시에 엄결한 '이 시대 마지막 안동 선비 시인' .때문에 어느 시, 어느 구절이든 버릴 것 하나 없이 '강철 무지개' 처럼 굳고 아름답게 빛난다.

이번 시집에는 전집 이후 지난 10여년간 쓴 시 61편을 담고 있다.

“늘그막에 젊어 어느 때보다 다작을 한 셈이고 또 나의 개인적 음성이 짙게 배어 있다” 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 '달맞이꽃' 에는 金씨가 시인.교수.생활인으로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정이 따뜻하게 흐르고 있다.

위 시 '북어' 에서와 같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연민을 넘어 자신을 통째로 던진 동료의식까지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金씨 특유의 '찬바람 이는 겨울 하늘' 같은 냉정 혹은 시적 엄정성도 지키려 힘쓰고 있다.

“겨울의 지배는 철저하다.

/눈과 얼음의 철통체제를/감히 거역할 자는 없어 보인다.

/나무들은 위축되다 못해/까맣게 질려 눈 속에 곤두박히고/왼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그러나 산골짝 시냇물은/얼음 속에서 공작을 멈추지 않고/가지마다 반란의 창끝을 곤두세운다.”

엄동설한에도 봄을 기약하고 있는 시 '봄을 기다리며' 일부다.

까맣게 질리게 하는 '철통체제' 의 겨울 속에서도 만물은 봄을 위한 '공작' 을 멈추지 않는 게 자연의 이치이자 창끝 같이 곤두 선 인간의 의지임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고희를 넘어서인가.

이번 시집에는 고향 안동 산골 마을과 가난했던 유년을 회상하는 시도 많다.

멀건 수수죽 끓이는 연기가 배고픈 눈에 구수하게 피어오르던 유년의 산골을 그리면서도 선비적 기질만은 올곧게 내비치고 있다.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 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 (陸史) 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오늘도 타는 저녁 노을 속, /깃털을 곤두세우고/찬 바람 거스르는/솔개 한 마리.” 시 '솔개' 에서 金씨는 모든 거짓.위선.허례 타 털어버린 진실.지조를 찬 겨울 하늘을 나는 솔개를 통해 보고 있다.

같이 펴낸 '시와 시인들' 에서도 우리 시.한시.영시 등을 폭넓게 살피며 시인들에게 시의 위의 (威儀) 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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