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화의 봇물 '감춰진 부실'…기각되면 파산·법정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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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화의 (和議) 로 몸을 피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고 있다.

기업은 당장 도산 (倒産) 을 면하지만 채권은행에는 6개월~1년의 시차를 두고 부실채권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어 금융계의 '감춰진 부실' 로 지적되고 있다.

16일 금융계에 따르면 기업들의 화의신청 건수는 지난해 9월 이후 연말까지 4개월간 크게 늘어나 서울지법에 접수된 것만 54건으로 96년 (4건)에 비해 13.5배로 증가했다.

화의는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중소기업들이 주로 신청해 왔으나 9월 진로그룹이 대기업으로는 처음 화의를 신청하자 기업규모와 관계없이 부도에 직면한 기업들의 탈출구로 이용돼 왔다.

또 올들어서도 나산그룹.크라운제과.금강공업.신진건설.금강정공 등이 이미 화의를 신청했거나 신청할 예정인데다 현재 화의신청을 위해 거래은행들과 협의 중인 기업도 1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져 그 건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상당수 시중은행들이 은행당 평균 30~40개에 달하는 거래기업들과 화의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은행들의 경우 실세금리가 크게 높아졌는데도 부실기업에 특혜금리로 돈이 오래 묶이게 돼 자금운용에 상당한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또 화의가 기각되거나 도중에 깨지면 신청기업은 법정관리나 파산절차에 들어가게 돼 해당기업의 금융여신이 즉시 은행의 부실로 잡히게 된다.

특히 이달말부터 진로그룹을 시작으로 화의절차 개시여부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잇따를 예정인데 기각 건수가 증가하면 은행의 부실채권도 함께 눈덩이처럼 늘어나게 된다.

S은행의 한 임원은 "화의절차에 들어간 기업들을 장기간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전체적으로는 한몫에 당하는 부실을 오랜 기간 나눠 지는 셈" 이라고 말했다.

한편 부실기업들이 화의를 선호하고 있는 것은 법정관리와는 달리 기존 오너가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데다 상환금리도 초우량기업에만 적용되는 저금리를 장기간 적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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