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멋대로 쓰고 맘대로 덥히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경제위기를 넘기자고 모든 경제주체가 허리를 조르는 가운데 일부 공공기관에서 실내온도를 여름 날씨처럼 덥게 하고 예산과 기금을 멋대로 쓴다는 소식은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난국극복의 절박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그 실천에 솔선수범해야 할 공공기관이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

지금 대부분의 민간 사무실은 실내온도를 20~17도로 낮추고 있다.

석유 한방울 안 나오고 1년 수입 에너지 값이 2백40억달러를 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는 비록 IMF 한파가 닥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할 일이다.

하물며 하루 하루 숨가쁘게 넘어가는 국가 부도의 위기 속에서 이렇듯 전기를 낭비하고 에너지를 과사용하는 일이 딴데도 아니고 공공기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보도된 바로는 정부1, 2청사와 국회의원회관 등 몇몇 공공기관 사무실은 셔츠나 얇은 블라우스 바람으로 일하고, 방안이 덥다고 창문까지 열어 놓았다고 한다.

내복을 입고 점퍼를 걸치는 이른바 IMF 복장을 차린 이웃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22도도 춥다고 전기난로까지 사용하는 곳도 있다.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정부투자기관 또는 출연기관이 자체 예산을 눈 먼 돈처럼 멋대로 쓰고 각종 기금을 이리저리 낭비한다는 소식은 더 분통을 터뜨리게 한다.

어느 국책은행은 총재 급여를 3년간 90%나 올리고 어느 연구기관은 정부 지원금을 가지고 직원 아파트를 마련, 일반인에게 임대까지 했다.

물론 해당기관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으나 감사원에 지적된 방만한 운영실태는 혀를 차게 하기에 충분하다.

한편 일반회계 예산의 1.5배가 넘는 75조원의 국가기금중 24조원이 부실 운용되고 있다.

7개 투자기관이 정원 외로 수용한 '위성 공무원' 은 6백55명이나 된다.

이러고도 정부 경쟁력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노사정 (勞使政) 위원회에서 국민 대단결의 사회협약을 맺자고 호소할 자격이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기회있을 때마다 정부가 위기관리 능력을 보이라고 각계는 호소한다.

정권 교체기에 따르는 기강해이는 사회를 무질서로 몰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비상시에는 비상시답게 공공기관이나 공직자가 난국 극복에 앞장서라고 권고한다.

이 모든 호소와 충고와 권고가 결국 '쇠 귀에 경 읽기' 가 되고 있으니 아무래도 한국은 더 고생을 해봐야 깨닫는 별 수 없는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경제주권을 유보 (留保) 당하다시피한 IMF 관리체제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상처나게 했다.

국민을 더 실망시키기 전에 공공기관이나 공직자의 대오각성 (大悟覺醒) 을 바란다는 말밖에 더 이상 충고할 말이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