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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하듯 불평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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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병원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생긴 일이다. 한 사람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자 상당히 큰 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일 처리가 이래서야 누가 여기 다시 오겠어?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동행한 사람에게 얘기를 하는 것인가 봤더니 혼잣말을 하는 것이었다. 다만 목소리를 높여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얼중얼은 분명히 아닌, 의도적인 큰 목소리. 사람들은 엘리베이터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불편해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의료진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자 혼잣말의 볼륨은 커졌고 불만의 수위는 높아졌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일 분여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뿔싸, 그 사람이 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람들은 거기에 동승하는 것을 머뭇거리는 표정이 역력했다. 불편하더라도 빨리 올라갈 것이냐, 아니면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것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더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그의 혼잣말을 듣는 것은 몇 배는 괴로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떠난 후 다시 무료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그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오늘 기분도 나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직접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를 찾아가 필요한 요구를 할 수준도 아닐 것 같았다. 아니면 그 정도의 용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만히 분을 삭이고 있기에는 울컥하는 마음이 너무 강렬해 목구멍 위까지 감정이 차올라 왔으리라. 나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하니 말이다. 이때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혼잣말 하듯이 불평하기’였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전략적으로 탁월한 선택이다. 형식적으로는 분명히 혼잣말을 하는 것이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만일 답답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하소연하면 “나중에 얘기하자”나 “다른 이유가 있겠지”라는 식의 제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형식상 혼잣말이니 그럴 우려도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면 된다. 주변에 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 일종의 일인시위를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그러니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혼잣말하듯 불평하기는 꽤 쓸 만한 소통의 전략이다. 스팸 메일을 뿌리는 것과 같은 효과다. 그러나 소통의 쌍방향성을 생각할 때 듣는 사람의 입장은 난감하기 짝이 없다. 혼잣말의 탈을 쓴 불편한 말을 원치 않지만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니 말이다. 좋은 말을 들어도 시원찮은데 대부분 안 좋은 얘기들이니, 긴장과 경계심만 올라가고 만다. 아무리 혼잣말의 내용에 동감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 한들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들으면 좋고 안 들어주면 그만이고’라는 식으로 혼잣말하듯이 불평을 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갈수록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열심히 호소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의 소산이라 이해된다. 이러니 점점 각자 혼잣말만 해, 시끄럽기만 하고 남는 것 없는 공허한 세상이 되는 것 같다. 갈수록 소통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혼잣말만 늘어간다. 원래 혼잣말은 생각을 정리하고 내면을 반추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된 노릇인지 요즘은 혼잣말이 확성기로 보직 변경을 했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