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벌정책 진로와 과제]2.고성장견인·이젠 빚바랜신화…功過는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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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의 경제정책과 체육정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표선수만 집중적으로 키워 왔다는 것이다.

한국재벌은 한마디로 정책적 산물이었다.

이는 또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맨주먹으로 경제를 일으켜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60년대 한국은 세계 최빈국에 속했다.

국내저축은 턱없이 부족했다.

가난했던 만큼 내수시장도 변변치 못했다.

짧은 기간 안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자를 동원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 빚으로 시작한 장사를 단기간에 흑자로 돌려 놓자면 가장 수완이 좋은 장사꾼에게 외자를 몰아 줘야 했다.

이를 통해 60년대 섬유.신발 등 경공업에서 초기재벌이 탄생했다.

그러나 경공업은 한계가 있었다.

뭉칫돈을 벌어 오자면 중화학공업으로 국내 산업구조를 한 단계 끌어올려야 했다.

그런데 중화학공업은 초기에 엄청난 자본을 쏟아 부어야 하는 반면 수지를 맞추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를 무시한 경쟁적인 중화학공업 투자가 제1, 2차 오일쇼크와 맞물리면서 80년대 초반 국가위기 사태를 불러왔다.

그러나 중화학공업 투자는 규모가 워낙 큰 데다 짧은 기간 안에, 그것도 대부분 외자에 의존해 벌여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조정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정부의 인위적인 교통정리가 뒤따랐고 여기에 대표선수 육성정책이 다시 적용됐다.

살아남은 재벌에는 부실기업을 헐값에 넘겨준 것은 물론 빚을 깎아 주고 장기저리의 종잣돈 (시드 머니) 까지 대 줬다.

다른 기업의 신규진입은 철저하게 봉쇄해 독과점지위를 누리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정경 (政經) 유착이 고질병으로 굳어졌다.

한국재벌의 대마불사 (大馬不死) 신화도 여기서 비롯했다.

재벌의 도산이 국가경제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만큼 덩치가 커졌기 때문이다.

금융산업이 대표선수 육성을 위한 시녀로 완전히 전락한 것도 이때부터다.

대출에 대한 정부의 간섭도 문제였지만 금융기관도 스스로 신용평가 능력을 키울 이유가 없었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빚보증이라는 '한국적 대출관행' 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대마불사인 재벌그룹의 보증은 정부보증이나 다름없었던 것. 대출심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신용평가라는 기능이 아예 퇴화해 버렸고 이 때문에 담보 및 계열사 보증대출 관행이 굳어졌다.

반면 이를 통해 한국기업이 단기간에 엄청난 자본과 기술축적을 이뤄 낸 것도 사실이다.

한국기업들이 조선.철강.전자.자동차 등의 분야에서 세계 10대 기업 안에 들게 된 것도 이런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90년대 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개방의 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개방은 대표선수 육성을 위한 국내 제도 및 관행을 경쟁이라는 새로운 틀로 완전히 바꿀 것을 요구했다.

재벌은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말로는 글로벌경영을 외쳤지만 빚을 얻어다 일을 벌이기만 하면 살아남는다는 차입경영 체질과 오너 독단경영구조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 결과 국제통화기금 (IMF) 이라는 타의 (他意)에 의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자초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재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경제 자체가 대표선수에게 의존해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개혁은 한국경제 전체의 구조조정과 동전의 양면일 수밖에 없다.

대표선수 육성에 맞춰져 있던 금융.산업구조와 정책.관행을 시대변화에 맞게 총체적으로 바꿔야 재벌문제도 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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