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 ? … 통화 당국의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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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말에는 판단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개념만이 아니라 이래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다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된 ‘과잉 유동성’이란 말이 그렇다. 시중에 풀린 돈이 너무 많으니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발단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입이었다. 그는 16일 국회 기획재정위에서 “시중에 풀려 있는 800조원의 단기자금은 분명히 과잉 유동성”이라고 말했다. 원론적인 말이지만 시장엔 긴장감이 나돌았다. 기존의 정부 노선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전임 강만수 장관은 지난해 초부터 경기부양을 위해 한국은행의 금리인하를 촉구했다. 또 지난해 말엔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협력해 시중에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나온 ‘과잉 유동성’ 발언은 주가와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가격 상승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한은이 금리를 올려 돈줄을 죌 수도 있다는 성급한 해석을 했다. 교과서적으로 볼 때 돈이 모자라면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너무 많으면 물가가 오르고 자산 버블이 나타난다. 이를 적정하게 관리하는 게 한은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과서가 별 쓸모 없는 상황이다.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지난해 말부터 돈을 쏟아붓곤 있어도 경기회복을 실감할 단계가 아니다. 과잉 유동성이 정말 문제가 되려면, 일부 자산가격이 아니라 소비자 물가가 전체적으로 확확 올라 인플레 열기가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의 바닥이 곧 닥칠 것인지조차 긴가민가한 상태다. 게다가 ‘과잉’의 기준이란 것도 없다. “지나고 보니 그때 돈이 넘쳤던 것 같다”고 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잉 유동성 논란은 불난 집에서 불길이 조금 잦아들자 ‘왜 물을 그리 많이 뿌렸느냐’고 시비를 건 것과 같다. 전문가들도 현 시점의 과잉 유동성 논란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김태준 금융연구원장은 “아직 돈이 필요한 곳으로 가지 않고 있는 마당에 유동성 환수를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지금은 저수지에 담아 둔 물(유동성)이 많다 적다, 하고 논쟁할 때가 아니라 저수지에서 논밭(기업)으로 물이 갈 수 있는 수로를 내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상무). 한은도 통화정책의 기조를 당장 바꾸는 데는 부정적이다. 이성태 한은총재는 23일 국회에 출석해 "지금 상태에서 유동성이 너무 많다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윤 장관도 22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난달 취업자가 20만 명(전년 동월 대비) 가까이 준 상황에서 통화 긴축을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로써 과잉 유동성 논란은 일단 수면 아래로 들어간 셈이다. 다만 시중에 풀려 있는 돈을 적절한 시점에 스무스하게 환수할 대비책을 세울 필요는 있다. 2001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이 부동산 가격을 밀어 올렸고, 이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해나 실수로 비칠 법한 윤 장관의 발언은 다른 한편으론 단기 과열에 대한 경고로도 볼 수 있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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