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개성공단, 우리의 대응 기준은 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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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북한이 또 죽을 꾀를 냈다. 최근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면서 개성공단에 부여하고 있는 ‘특혜적 조치’들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개성공단을 폐쇄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진 것이다. 현 정부 들어 남북 당국자 간 첫 접촉에서 북한이 보여준 게 고작 개성공단 흔들기란 사실에 실망이 크다.

개성공단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남북한이 서로 양보와 타협을 통해 성사시키고 유지·발전시켜온 남북 화해 협력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실리적으로도 남한은 중국 등에서 이탈하는 기업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고, 북한은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일자리를 만들어온 ‘상생의 현장’이다. 지난 9년여 동안 개성공단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확대 발전돼 왔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동안에도 남한 기업 여럿이 새로 입주했고 북한 근로자도 늘었다. 이 점은 개성공단을 통해 남북한 모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누려왔음을 증명한다.

북한이 단순히 경제적인 잇속만을 따져 ‘특혜 철회’를 운운했다면 협상이 쉽게 풀릴 수 있다. 눈앞의 이익만 좇는 근시안적 조치를 지적하며 설득한다면 적절한 선에서의 타협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북한이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을 남쪽에 전가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정치가 모든 다른 부문에 앞서는 북한 체제 특성상 이번에 제기한 요구를 적절한 선에서 무마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개성을 둘러싼 남북 당국의 협상은 지극히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현 단계에서 중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이 우여곡절 없이 지내온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질기게 뿌리내린 개성공단은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보루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개성공단을 둘러싼 북한의 오판(誤判)에 정부가 지혜롭고 끈기 있게 대처해야 하는 이유다.

다만 우리가 개성공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북한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려 들 것이다. 현대아산 근로자 억류사건과 유사한 사건, 그보다 더한 사건도 예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개성공단을 맹목적으로 지켜야 한다거나, 반대로 일시적인 흥분에 따라 폐쇄해도 좋다는 식의 결정이 있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 나름의 기준을 갖고 개성공단을 어느 선까지 지켜내야 하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시나리오별 대응 전략도 마련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기준은 정부의 어떤 결정도 국민들의 단합된 지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북한에 저들의 행동이 오판임을 깨닫게 할 수 있다.

정부는 남북 당국자 간 첫 접촉을 계기로 대북 정책 전반을 총체적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가입 문제를 둘러싼 작금의 혼선은 물론 현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급전직하로 악화돼온 과정을 보면서 정부가 과연 남북관계를 안정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끌어갈 비전과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분명한 원칙과 유연한 뉴 플랜이 제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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