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재벌정책 시장에 맡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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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IMF가 한국의 재벌해체를 주장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IMF가 그렇게 무식한 짓을 할 리가 없다.

IMF가 원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핵심인 '공정한 경쟁여건 (a level playing field)' 의 보장이다.

포철의 철강, 삼성의 반도체, 현대의 자동차 모두 음덕 (陰德) 으로 오늘의 지위를 확보했다고 본다.

정부가 은행의 대출결정에 관여하는 것은 음덕의 일종이다.

계열사간 내부거래나 상호지급보증도 마찬가지다.

결국 망했어야 마땅한 기업이 간판을 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는 드러나지 않은 음덕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제일.서울은행에 대한 구제금융, 심지어 한국에 대한 IMF 지원도 음덕의 일종이니 불가하다는 것이 미국의 일반 여론이다.

공정한 경쟁여건은 거래가 투명할 때 형성된다.

그래서 IMF는 공시를 철저히 하고, 독립된 외부감사를 받고 (이 점에 있어 공인회계사들은 수치를 느껴야 한다) ,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개별기업에 보조금이나 세금혜택을 주지 못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IMF가 투명성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예를 들어 보자. 51쪽에 달하는 IMF합의서 (영문) 중 부속물 (표.스탠바이자금지원내역.경제개혁조치) 을 제외한 첫 16쪽에 투명성 (transparency) 이란 단어가 무려 14번 출현한다.

쪽마다 거의 한번씩 사용된 셈이다.

투명성이란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을 말한다.

명료하다는 뜻도 되고 솔직하다는 의미도 있다.

IMF가 투명성을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간단하다.

투명하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고 신뢰가 없으면 온전한 의미에서의 시장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벌정책은 용어 자체가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재벌정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소유분산이나 출자제한도 반 (反) 시장적이다.

상호지급보증 자체를 범죄시할 것이 아니라 지급보증으로 인한 손실에 대해 해당 기업 주주들의 청구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지운다면 이사회는 정당한 대가 없이 함부로 지급보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양과 염소' 를 가리는 작업은 시장의 몫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대중 (金大中) 당선자가 "기업에 대한 부당한 간섭도, 특혜도 없을 것" 임을 강조한 것은 주목되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새 정부는 투명한 경기규칙을 만들고 그것이 시장 참여자들에 의해 제대로 이행되는지 철저히 감시하는 역할에 만족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서 거는 기대가 크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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