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욕 먹는 대통령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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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제가 정말 어렵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감한다.

해가 바뀐다고 나아질 희망이 전혀 없다.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질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너나할것없이 새 대통령에게 기대가 쏠리고 있다.

대통령 한사람이 국가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는 현정권 아래에서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일찍이 경제전문가를 자부해 왔다.

젊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면도날 재경통으로 이름을 날렸고, '대중경제론' 등 경제저서도 여럿 펴냈다.

이번 선거에서는 '경제대통령' '준비된 대통령' 임을 내세웠다.

과연 그는 경제대통령으로 얼마나 준비가 돼 있으며, 특히 위기의 한국경제를 어떻게 구해낼지 궁금하다.

사실 그의 경제실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다.

70대 중반의 고령임에도 젊은이들 뺨칠 정도로 경제통계들을 꿰고 있다.

지금 대통령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지난 선거때도 경제에 관한 한 金당선자는 다른 후보를 단연 앞섰다.

이제 대통령이 됐으니 그로서는 실력의 본때를 보일 기회를 잡은 셈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고뇌의 조짐이 완연하다.

임창열 (林昌烈) 경제부총리의 보고를 받은 첫날부터 "밤잠이 안온다" 고 실토했다.

유세기간중 큰소리쳤던 장밋빛 청사진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거둬들였다.

당선을 위해 허황된 약속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더이상 고집하지 않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취업문제는 걱정하지 말라" 던 큰소리도 쑥 들어갔다.

일자리를 늘리기는커녕 당장 정리해고제의 총대를 메야 할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

지난해말 날치기 노동법 개정을 개탄하며 정리해고제 반대를 지휘했던 그가 이젠 즉각 실시를 관철시켜야 할 운명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부채탕감을 비롯해 농어촌에 대한 지원확대를 외쳐왔던 그가 이젠 긴축재정이라는 이름 아래 그쪽 예산부터 송두리째 잘라내야 할 판이다.

사회복지의 상당부분도 마찬가지 신세다.

말을 바꿨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도리어 비난을 감수하며 비인기정책을 택한 용기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굳이 따지자면 아직도 2개월의 임기가 남은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이 매듭지어야 할 일까지도 그가 뒤집어 쓰고 있다.

현대통령의 직무유기를 탓할 겨를조차 없으니 어차피 차기대통령이 미리 나설 수밖에 없다.

결국 金당선자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엄청난 시련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팡파르 소리를 들어보기도 전에 언제 어디에서 달걀 세례를 당할지도 모른다.

한두달에 끝날 경제난이 아니다.

1년이 갈지, 2년이 갈지 모를 마이너스 성장을 각오해야 한다.

더구나 그가 택할 수 있는 정책수단은 지극히 제한돼 있다.

생색낼 수 있는 정책은 하나도 없다.

오직 국민들의 고통 감내를 요구하는 쓰디쓴 처방만이 그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 내켜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경제의 생살여탈권을 거머쥐고 있는 국제통화기금 (IMF) 눈밖에 났다가는 끝장이다.

한마디로 金당선자에게는 괴로운 결정들만 기다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오랜 정치적 기반이었던 노동자들부터 들고 일어날 참이다.

이래저래 불가피해진 정리해고제를 입법화하고, 또 그에 따른 무더기 해고현상이 눈앞의 현실로 벌어질 경우 그는 바가지로 욕을 먹을 것이다.

농어촌 구조조정 예산을 싹독 잘라버릴 경우 여기에서도 숱한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경제이야기만 나오면 막힘이 없던 그다.

이젠 그게 아니다.

그는 이제 번번이 막힐 수밖에 없다.

무엇 하나 시원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야속한 현실을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기도 전에 이미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기대하는 것도 왕년의 청산유수 같은 유창한 연설이 아니다.

설령 말은 더듬거리더라도 국민들의 고통감내를 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발휘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장규<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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