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봉' 자청에 '감원' 백지화…중소 제화업체 IMF 한파 넘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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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모두 같이 일할 수만 있다면 임금을 30%가 아니라 절반으로 줄여도 좋습니다.

오후6시에 마치던 작업시간도 오후7시까지 연장하기로 이미 직원들끼리 합의했습니다.”

지난 20일 오후6시 서울관악구봉천동 구두 제조업체 지인상사 사장실. 회의용 탁자 위에 소주 8병과 돼지고기 10접시를 차려놓은 채 회사 송년회가 열리고 있었다.

티셔츠 차림의 김형희 (金炯熙.43) 사장과 점퍼를 입은 직원 36명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지 못한 채 10여분이 흐르자 가장 고참직원인 한상래 (韓相來.40) 씨가 견디다 못해 겨우 말을 꺼낸 것이었다.

이날 송년회는 급격히 악화된 경영위기를 넘기기 위해 金사장이 감원사실을 통보하며 실직 직원들을 위로하기로 한 사실상 '송별회' 자리여서 분위기는 납덩어리 같을 수밖에 없었다.

지인상사는 K제화 등 굴지의 제화회사들에 매월 3억원어치씩 구두를 납품해온 탄탄한 중소기업. 89년 창업 이후 아이디어 개발에 힘을 기울여 이제는 '신모델 제조기' 로 확실히 자리잡은 기업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로 자금회수가 안되고 원료값이 엄청나게 뛴데다 내수시장까지 얼어붙는 바람에 하는수 없이 회사가 전직원의 30%쯤인 10여명을 감원하기로 했고 감원계획은 눈치빠른 직원들을 통해 이미 사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평소 어느회사 부럽지 않은 노사관계를 자랑하던 직원들도 이날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金사장도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회사가 어려운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장님. 여태껏 애정과 땀으로 함께 일해온 저희가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감원만은 제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 韓씨의 말이 계속되자 金사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는 듯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한참동안 직원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金사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까지 저와 회사를 아끼고 어려움을 이해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정말 월급이 절반으로 깎여도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하나 둘씩 직원들이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원계획을 백지화하겠습니다.

임금삭감도 20% 안쪽으로 약속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한데 뜻을 모으신다면 더이상 두려울게 없습니다.

그동안의 신용이 쌓여 있어 우리는 다른 회사보다 그나마 좋은 여건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金사장은 자신의 중형 브로엄승용차를 소형 아벨라로 바꾸고 판공비도 20% 이상 줄이겠다고 덧붙였다.

박수소리가 사장실이 떠나가도록 한참동안 계속됐다.

곧이어 여직원들의 훌쩍이는 소리와 박수소리.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뒤섞이면서 얼어붙었던 모임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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