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하고 찡하고 우습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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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12면

# 1 조용한 거실에 딸과 남편, 그리고 ‘나’ 셋이 마주 앉았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이혼하겠다고 나서자 30대 딸이 심판관으로 와서 마련한 자리입니다. 딸은 부모님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다며 재산 분할 문제를 꺼냅니다. ‘알몸으로 쫓겨날 수는 없다. 싸우자. 칼을 들고 싸우더라도 싸워서 이기자’ 맘속으로 벼르는 나. 남편이 허를 찌릅니다. “아빠는 차와 연금만 갖고 나간다. 나머지 모든 재산은 엄마에게 주겠다.”

김성희 기자의 BOOK KEY

나는 슬며시 맥이 풀리는데 딸은 서로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면 좋겠다고 한 술 더 뜹니다. 비용이 천만원이라나요. ‘독한 계집애. 부모 이혼한다는데, 쓸데없이 돈 나가게 변호사를 사라고?’

그 딸이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자식들을 위해 부부문제 클리닉에 가 상담을 받아 달라고. 나는 모기만 한 소리로 묻습니다. “얘, 상담소 비용은 얼마니?”(『엄마는 사춘기』에서)

#2 한창 독서 삼매경에 빠져드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야릇하니 들려온다…나 혼자 듣는 것이라면 까짓것 그냥 들려오는 대로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한데 지금은 아들 녀석과 둘이 있는 상황이 아닌가…신음 소리를 내는 대회에 출전한 것도 아니고, 갈수록 점입가경이라 나는 환장할 지경에 이르렀다…고맙게도 내 눈에 텔레비전 리모컨이 들어왔다. 잽싸게 리모컨을 움켜잡고 파워 단추를 누르고 겁나게 빠른 속도로 음향을 높였다. 내 입에서 신음 소리에 가까운 말이 터져 나왔다. “이런, 이런! 하마터면 9시 뉴스를 놓칠 뻔 했잖아!”(『해남 가는 길』송언 지음, 우리교육)

글 잘 쓴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은 아득하지만 20년이 넘게 신문사 밥을 먹다 보니 더러 글쓰기 강의를 합니다. 창작이 아니라 기사 쓰기에 관한 것이어서 이러구러 넘어가는데 그런 자리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멋진 글을 쓰려 억지로 꾸미지 말고 진솔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라는 당부입니다. 설득이나 주장을 펴기 위한 논리적 글은 논외로 치더라도 쓰는 이의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글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위의 두 책은 말 그대로 진정성이 가진 힘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엄마는 사춘기』(김희경 지음, 마고북스)는 직업군인인 남편을 따라 서른네 번 이사한 끝에 지금은 제주도에서 작은 펜션을 운영하는 50대 후반의 주부가 쓴 것입니다. 전방에서 ‘사모님’과 벌인 신경전에서 어머니의 정이 담긴 실패, 산길에서 만난 ‘김 사장’의 황당한 애프터 신청 등 따뜻한가 하면 코끝이 찡하고, 걸쭉하다 싶으면 포복절도할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에 비하면 시인 아버지가 쓴 『해남 가는 길』(송언 지음, 우리교육)은 잔잔합니다. 고3 진급을 앞둔 아들과 한겨울에, 9일간에 걸쳐 도보여행한 이야기인데 극적이지도 오사바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읽노라면 보통 사람들의 정겨운 이야기, 숙소에서 서로 어깨를 주물러 주는 등 말 없는 가운데 오가는 부자간의 정 등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집니다.

아, 뒷이야기를 살짝 전합니다. 제주 부부는 클리닉 가기가 귀찮아 그냥 산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숙소인 모텔에서 MP3 이어폰을 끼고 모르는 체하던 속 깊은 아들은 서해 밤바다를 보며 감상에 젖은 아빠에게 “밤이라 바다가 잘 안 보여. 아빠, 저녁은 뭘 먹을까?”라고 묻더라네요.


경력 27년차 기자로 고려대 초빙교수를 거쳐 출판을 맡고 있다. 특기 책 읽기.『맛있는 책읽기』등 3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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