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문화 '새뚝이']뮤지컬'명성황후'제작 연출 윤호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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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뮤지컬 '명성황후' 의 제작.연출자 윤호진 (49) 씨의 이력은 90년을 전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이전까지 그는 탁월한 연극 연출가였다.

윤씨는 명문 실험극장의 간판 얼굴로 70.80년대 이땅의 '연극 르네상스' 를 주도했다.

그는 '마이다스의 손' 으로 불리며 '아일랜드' '신의 아그네스' '에쿠우스' 등 실험극장의 주옥같은 명작을 빚어냈다.

90년대 들어 그는 홱 다른 길로 돌아섰다.

'새로운 모색의 과정' , 그 끝은 뮤지컬이었다.

87년 4년간의 뉴욕대 공부 (공연학) 를 마치고 돌아온 윤씨는 "앞으로 이것 (뮤지컬) 만이 살길이다" 라고 외쳤다.

그의 전력에 비춰 당시로서는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꾼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과 같은 폭탄선언이었다.

마침내 93년 윤씨는 뮤지컬 전문극단 에이콤을 창단했다.

"조만간 '명성황후' 를 세계적인 명작으로 만들겠다" .창단 일성 (一聲) 은 이렇게 원대했고, 그 꿈과 도전은 올 8월 뉴욕 링컨센터 공연으로 첫 싹을 틔웠다.

'명성황후' 의 뉴욕공연은 한국 공연사의 '모뉴먼트' 다.

교민초청 위문공연 차원을 탈피해 순수 국산뮤지컬의 정식 대관공연이란 점이 하나의 '사건' 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주체적인 문화상품의 수출에 목말라 있었다.

또한 그것은 척박한 제작풍토에서도 '나도 할 수 있다' 는 의지를 불태운 윤씨 특유의 뚝심과 포용력, 인복 (人福) 의 승리였다.

지난 12일 끝난 '명성황후' 서울 앙코르 공연은 '국민 뮤지컬' 의 탄생 선언이었다.

마침 불어닥친 IMF 한파도 거뜬히 넘겼다.

관객 4만명, 4억원 (협찬금 포함) 의 수익을 올렸다.

96년 초연 (관객 10만) 의 흥행성공에 이은 연타석 홈런이었다.

1백년전 외세의 강풍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던 조선의 운명이 바로 오늘의 정국과 대비됐다.

소복을 입은 명성황후가 피날레곡 '백성이여 일어나라' 를 부를 때 무대와 객석은 눈물로 하나가 됐다.

그러나 '명성황후' 는 돈없는 개인 제작자 (5인 운영위원회의 제작지원을 받고 있다) 란 한계때문에 재정자립도가 지극히 취약하다.

아직은 공연때마다 제작비 (10억원대) 대비 적자행진이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익을 낼수 있을 것" 이라며 윤씨는 자신했다.

내년 윤씨는 10억원의 문체부 지원금을 받아 런던과 파리 무대에 도전장을 낸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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