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10%의 결심을 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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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투표날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면 누군가가 대통령에 당선돼 있다.

이제부터는 그를 나의 대표로, 우리의 대표로 삼아 5년간 나라를 맡겨야 한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따라 나라의 장래도 바뀌고 나의 운명도 바뀔 수 있다.

요즘처럼 우리가 어떤 사람을 뽑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적도 없다.

이 시절이 평상시만 같아도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나라는 이제까지와 같이 그럭저럭 굴러갈 것이고 국민들은 자신의 생업을 영위해 나갈 것이다.

정치나 선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회 각 분야가 제 역할대로 움직여주는 나라가 선진국이며 안정된 나라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은 지금 매우 위급하다.

누가 되든 나라는 굴러가게 돼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되느냐에 따라 상황이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아마 내일부터 그러한 변화를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숨 넘어가듯 나라 부도를 모면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결과에 따라 주저앉을 수도 있고 그나마 숨통이 열릴 수도 있다.

만일 더 나빠진다면 수습국면의 금융위기가 다시 고개를 들어 기업들의 연쇄부도가 이어질 것이고 그 여파는 각자의 직장으로 번지게 돼 있다.

그 결과는 곧 나와 내 가족의 생계에 직결된다.

이번 선거에는 유난히 부동층이 많다.

며칠 전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동층이 25%에 달했고 당장 오늘 아침까지 결심하지 못한 유권자만도 10% 이상 되리라는 분석이다.

어제까지 여론조사 결과로는 1, 2위의 차이가 오차한계 속에 있어 정말 누가 당선될지 예측을 불허한다.

결국 이 아침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의 향배가 이번 선거의 당락을 좌우할 것이다.

이들이 지금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유는 수긍이 간다.

세 후보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는 병역이, 누구는 약속위반이, 누구는 경선불복 때문에 뽑기 싫은 것이다.

오죽하면 이번 투표용지에 재선거란을 만들어 그것이 과반수가 되면 각당이 후보를 다시 내 재선거하자는 농담까지 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투표를 포기해도 누군가는 내일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모두 그 영향을 받게 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후보를 선택하는 데 있어 각자의 이익관점에서보다 명분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억압체제 아래의 선거에서 각 개인의 실생활이나 이익의 관점에서보다 반독재니, 민주화니 하는 큰 명분에 따라 투표해 온 전통 때문이다.

지금 선거판이 후보들의 결점만을 부각시켜 판단의 전부인양 된 풍토도 이러한 명분주의의 후유증이다.

독재니, 반독재니 하는 명분 싸움이 필요없게 되니 이제는 후보를 나쁜 사람, 좋은 사람으로 가르는 소 (小) 명분주의에 집착한다.

물론 결점이 없는 완벽한 후보가 소망스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이익에 합당한가가 최후의 판단기준이 돼야 한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에 미 공화당의 한 인사가 한국 교민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투표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많은 교민들은 막연하게 민주당이 가난한 계층을 보호한다니 좋은 정당이고, 공화당은 부자정당이니 우리 교민과는 거리가 먼 정당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소기업.가족단위의 사업을 하는 한국 교민들은 세금을 많이 걷는 민주당보다 사업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공화당을 찍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명분주의 때문에 자기 이익이 무엇인지도 판단치 못한 예다.

또 하나 주요 기준은 오늘의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됐느냐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며칠전 신용질서의 붕괴가 어떤 사태를 빚어내는가를 눈으로 보았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정부와 정치권을 믿지 못해 외국이 투자금을 회수해 가고 내부적으로는 정부와 금융기관을 불신해 예금 인출사태가 빚어졌다.

공동체에서 신뢰라는 줄이 끊어지고 나면 모든 것이 혼돈에 빠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따라서 이번 투표는 대내외적으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선거 결과가 한국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의 위기는 가속화할 것이다.

결심을 못한 10% 유권자는 누가 나라의 신뢰를 회복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지켜줄 것인가를 최후의 기준으로 삼아 투표장에 나가야 한다.

문창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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