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추적] ‘석면 약’ 판매금지, 국민정서만 좇아 비과학적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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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석면 오염 우려 의약품을 판매금지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결정을 놓고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일부 제약업체들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고 식약청은 잘못 결정된 약품 조정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식약청은 이번 결정을 전문가 집단에 의존했다. 중앙약사심의위원회(중앙약심)가 그것이다. 중앙약심은 8일 “위해 가능성은 없지만 소비자의 불안감 해소 차원에서 회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냈고 식약청은 다음 날 판매 금지했다.

전문가 집단이 ‘비전문적인 결정’을 내린 배경은 뭘까. 이날 중앙약심 회의에는 호흡기내과·신경외과·산업의학과·면역학 등 의사 4명, 약대 교수 3명, 대학병원 약제부장 2명, 간호대 교수, 소비자 단체 대표(분석화학 전공) 등 11명이 참석했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중앙약심 회의록에 따르면 위원들은 ‘과학’이 아닌 ‘국민정서’를 강조했다. “석면 오염 우려 의약품이 인체에 유해하다”고 말한 사람은 1명에 불과했다. “안전하다는 것을 전문가들이 알려야 한다” “경구 투여(먹는 것)의 위험성이 없다” “위해하다는 근거가 없다”는 등의 주장이 많았다.

판매 금지를 주장한 위원들의 근거는 이랬다. 한 위원은 “국민 정서 등을 고려해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위원은 “국민 정서적 측면에서 조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위원은 “석면 탈크를 사용한 의약품의 경우 국민 정서를 감안하면 회수하는 것이 대체로 맞다고 보지만 과학적인 입장에서는 회수할 필요가 없다”고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어떤 위원은 ‘과학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과학이 꼭 실험실 내에서만 과학이 아니며 현재 상황은 위험이 과장돼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베이비파우더와 화장품을 이미 회수 조치(판매금지)한 이상 의약품을 회수하지 않는다면 국민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과학적 판단만으로 결정하자는 위원도 있었다. 한 위원은 “사회적 이슈가 됐다고 해도 감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위원은 “회수하면 엄청난 혼란이 예상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결국 투표에 들어갔고 6대 5로 판매금지 결정을 내렸다.

회의에 참석한 중앙대 황완균(생약학) 교수는 “광우병 사태를 경험한 정부와 전문가 집단이 겁을 먹고 내린 정치적 결정”이라며 “따져보면 문제가 안 돼도 국민이 들고 일어날 수 있으니 미연에 방지하자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식약청 관계자도 “위원들이 광우병 사태를 떠올리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 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중앙약심 위원장 성균관대 이병무(독성학) 교수는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며 “정부가 지금이라도 회의를 열어 잘못된 결정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하 기자

◆중앙약사심의위원회=식품의약품안전청장과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에게 의약품 정책 전반에 대해 자문하는 기구. 100명의 의학·약학·독성학 등 전문가와 소비자 단체 대표가 5개의 전문 분과로 나눠 의약품의 분류, 안전성·유효성 검증 등을 심의한다. 결정의 강제력은 없지만 정부는 대개 이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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