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남은 두달이 너무 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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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점심시간을 이용한 대학동창끼리의 간소한 망년회 자리였다.

화제는 자연스레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느냐로 요약됐다.

한 동창이 공직사회의 개탄스런 최근 풍조를 전해준다.

어느 부처의 고위 간부가 부서기밀에 속할 문서를 복사해 한 대통령후보 진영에 팩스로 보냈다고 한다.

나중 이 사실이 들통났다.

문책하느냐 마느냐로 수군거리다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하명을 기다렸지만 감감 무소식이라는 것이다.

12월중 정부의 한 기관에선 정기인사를 해야 할 때인데 하루는 야당 대선후보 진영의 유력인사가 인사권자를 찾았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인사를 하려느냐, 대선 끝나고 하라! 이 한마디 일갈에 그 기관의 정기인사는 지금껏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창간 이런 식 정보교환을 액면대로 믿을 수는 없다.

과장이 있을 수도 있고, 얘기가 돌고 돌면 없는 사실도 그럴듯한 사실로 포장되게 마련이지만 지금 공직사회의 분위기가 대충 어떠한지는 확연히 실감케 한다.

임기말의 공직사회란 으레 이러했다.

여기에 예측불허의 대선전이 막바지로 치닫는 고비에서 국난이란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구제금융 결정이 내려진 지 열흘째다.

정부의 온갖 강도 높은 지원책이 연일 발표되지만 환율과 금리는 천정부지로 뛸 뿐이고 주가는 연일 곤두박질이다.

금융가엔 돈이 흐르지 않고 있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않고 은행이 기업을 믿지 못한 탓이다.

허리띠 졸라 매고 위기를 넘기자는 공감대는 저변에 흐르고 있지만 아직도 뜨거운 피가 사회 전체에 흐르고 있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난국을 주도해야 할 정치.경제.행정 지도자들의 의식이 공황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금융가엔 돈이 돌지 않고 국난의 위기를 넘기자는 공감대의 뜨거운 피가 돌지 않는다고 본다.

위기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인물과 조직이 난국을 헤쳐나갈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으니 지도력의 초점이 모일 수 없다.

국민이 믿지 않는 정부에 외국인이 뭘 믿고 돈을 꿔주고 투자를 할 것인가.

행정이 눈치보기와 자기모순에 빠져 있고 정치는 위기상황과 관계없이 표 모으기에 급급하니 국민들마저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에게 맡겨주면 1년 안에 위기상황을 극복한다느니, 국제통화기금 (IMF) 과 재협상한다느니 해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 매고 뛸 준비를 하고 있는데 뛰어야 할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야 할 정치.경제.행정 지도자들은 어느 곳에도 보이질 않는다.

이 난국을 헤쳐나갈 지도자는 대통령과 그의 참모, 그리고 관료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통령은 두달여 잔여임기를 남겨 놓고 있고 그 밑 관료들은 1주일 후면 드러날 새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렇게 두달이 흐를 것이다.

끝없는 추락에서 새로운 재도약으로 반전시켜야 할 절대절명의 시점에서 우리는 황금 같은 두달의 세월을 이렇게 보내야만 하는가.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에게 두 가지 점을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현 시점을 6.25와 같은 위기상황으로 파악하는 상황인식이 필요하다.

달러 몇 푼이 모자라 갑작스레 생겨난 일시적 외환위기가 아니라 정치.경제.국민 신뢰의 총체적 위기라는 급박한 상황인식 아래 남은 두달의 임기를 전장의 장군처럼 전선을 독려하고 막힌 곳을 뚫으며 돌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길 당부한다.

한가한 책임론과 수사적 대 (對) 국민담화보다 돈을 돌게 하고 지도자에 대한 국민 신뢰가 확산되게끔 하는 현장 독려가 시급하다.

안일하고 무책임한 관료는 전선의 즉결처분처럼 가차없이 날려야 한다.

기강을 살리고 위기의식을 전전선에 고르게 확산시켜 국민이 믿는 리더십을 지금이라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대통령 스스로 용퇴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헌정 중단의 파국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위기에서 대통령 스스로 두달의 행정공백 기간이 너무 길다는 판단이 서면 대통령 당선자를 유고시 권한대행을 할 총리로 임명하고 국회 동의를 얻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임기를 스스로 단축하는 결정도 헌법상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앞으로는 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선거와 이.취임의 간격을 현재보다 대폭 좁히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남은 두 달이 너무 길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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