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재경원 외환경고 묵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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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국은행은 지난 3월중순부터 외환위기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후 줄곧 청와대.재정경제원에 '환율변동폭 확대'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 요청' 등을 건의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한 것으로 8일 밝혀졌다.

특히 이경식(李經植) 한은총재는 이같은 건의가 수용되지 않자 10월말 이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10여차례 직접 전화를 걸어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필요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건의했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따라 외환위기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데는 당사자중 하나인 한은의 책임도 있지만 위기상황을 예상하면서도 늑장대응한 청와대.재경원 당국자들의 무사안일이 더 큰 문제였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 강경식 (姜慶植) 전부총리.김인호 (金仁浩) 전청와대 경제수석과 李총재는 지난달 13일 IMF구제금융을 신청키로 합의했고 같은달 16일엔 극비리 방한(訪韓) 한 캉드쉬 IMF총재를 만나 구제금융을 신청했음에도 19일 개각에서 姜전부총리의 바통을 이어받은 임창열(林昌烈) 부총리는 이를 부인하는등 그야말로 '실기 (失機)' '감추기' 로 일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최근 본사가 단독입수한 한은의 내부자료 '외환위기에 따른 대책' 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한은은 이미 3월중순 "비상시기에는 IMF구제금융도 필요하다" 는 내용의 보고서를 청와대.재경원에 전달한데 이어 10월하순 들어 홍콩 증시폭락 등으로 외환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같은달 27일 '외환사정과 대응방안' 이란 보고서를 통해 IMF구제금융을 받아야 한다고 청와대 등에 공식 건의했다.

李총재는 특히 11월초 姜전부총리. 金전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나 긴급대책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음날 金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외환위기 가능성을 거듭 강조한 뒤 姜부총리와 金수석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했었다고 李총재의 한 측근이 전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당시 재경원은 한은이 외화차입에 나서주길 바랐으나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한 결과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재경원에 알려줬다" 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경원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시간을 끌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박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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