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엔딩 노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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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33면

일본 서점의 스테디셀러 가운데 ‘엔딩 노트’란 게 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노트다. 유족에게 남기는 확대판 유언집이다. ‘라스트 플래닝 노트’라고도 한다. 문방구 코너가 아니라 상속 관련 서적 코너에 주로 꽂혀 있다. 불황 속에서도 꾸준히 팔리는 효자 상품이다. ‘엔딩 노트’ 쓰는 법을 다룬 책이 나올 정도다. 값은 종이로 된 보급형부터 가죽 제본의 고급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대개 1000~3000엔 정도다.

특별히 정해진 양식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백지 노트가 있는가 하면, 인생의 종점을 앞두고 이런저런 준비사항을 체크하도록 돼 있는 것도 있다. 또 자신의 경력, 교우관계, 병력, 재산 상태, 유산 배분 방식, 장례 방법, 유족들에 대한 메시지 등 구체적인 항목으로 나눠 쓰도록 돼 있는 노트도 있다.

유서가 법률적인 문서인 데 비해 ‘엔딩 노트’는 캐주얼하다. 법적 구속력은 없다고 한다. 내키는 대로 쓰면 된다. 일본 언론에 소개된 일부 내용을 보면 이런 식이다.

“장례식 때는 평소 즐겨 듣던 재즈를 틀어 주면 좋겠다.”
“내가 기르던 고양이는 손녀가 맡아 예뻐해 주길 바란다.”
“마지막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
“무리한 생명 연장은 원치 않는다.”

‘엔딩 노트’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 고령자들의 노후생활을 돕는 비영리법인 NALC(Nippon Active Life Club)가 고안했다. 그 뒤 지금까지 12만 부가 팔려 나갔다. 지금은 40대부터 ‘엔딩 노트’를 쓰는 사람도 있다. 정신이 희미해질 때까지 매년 고쳐 쓰겠다는 노인도 적잖다.

일본인이 노후뿐 아니라 사후까지 대비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60~70대는 고령 부모를 모셔 본 경험이 있는 세대다. 준비 없는 사후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남은 가족의 슬픔과 어려움, 또는 절박함을 겪어 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사후는 미리 정리해 두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이게 ‘엔딩 노트’의 시장 잠재력이다.

또 일본의 긴급구조대는 독거노인들에게 ‘엔딩 노트’를 작성해 현관에 걸어 두길 권장하고 있다. 만일의 사태 때 가족을 급히 부르거나, 노인의 병력을 빨리 파악하기 위해서다.

국제결혼이 빈번해진 것도 사후 대비 의식이 높아진 한 원인이다. 국제결혼을 할 경우 상속인과 피상속인이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거나, 해외 부동산이 유산으로 남기도 한다. 나라마다 제도가 다르므로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유족이 의외의 비용을 부담할 가능성이 있다. 이젠 상속도 국제화됐으니 그에 따른 대비가 필요해진 것이다.

국내에선 대기업 총수가 사망한 뒤 2세들끼리 재산 다툼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공증을 받은 유서나 유언을 남겨도 그렇다. 오히려 남은 가족의 마음을 보듬는 다정다감한 ‘엔딩 노트’를 미리 써 둔다면 혈육 간 다툼은 한결 줄지 않을까 싶다. 그런 뜻에서 ‘엔딩 노트’는 자신보다 가족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