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정치자금, 총액제한보다 투명성이 우선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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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또 다른 충격은 이 사건이 대한민국에선 도대체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이끌어 온 최고지도자들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통치체제를 구성하는 3권분립의 또 다른 축인 입법부의 수장 역시 두 명이나 불법자금 수뢰 의혹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은 정부와 국회의 권위를 대표하는 이들이다. 이 때문에 일반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의 사건처럼 이들의 비리 연루 의혹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통치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국가 기구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민주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법치와 공정한 정책 집행에 대한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와 존중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국가 기구가 적법한 권위를 지니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번 사건이 전두환·노태우 두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성격이 다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과 두 전직 국회의장의 수뢰 의혹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체제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과 존중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이번 사건은 정치와 돈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솔직히 현실 정치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와 돈의 관계를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차원에서 바라본 경향이 있었다. 이상적으로 볼 때 정치자금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치와 돈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래서 2004년 정치관계법 개정에서는 정치자금의 규모를 줄이고 모금 방법도 제약했다. 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듯이 현실 정치는 규정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실상을 감안할 때 정치와 돈의 부적절한 관계를 막기 위해서는 무턱대고 돈을 못 모으고 못 쓰게 하기보다는, 정치에 유입된 돈의 흐름을 제도적으로 투명하게 밝혀내도록 하는 데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액에 대한 제한보다 돈을 누구에게서 받았고 어디에 썼는지 그 흐름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빌렸다고 하지만, 빚이나 빌린 돈의 규모가 공직자 재산 공개에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제도적으로 밝힐 수 없는 그늘진 영역이 비리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민주주의는 또다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